우주의 법칙
끌어당기고 싶을 만큼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삶의 에너지원이 되지만,
적어도 나에겐 심장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간절함은 날카롭고, 갈망은 무겁다.
무언가를 끝내 얻어야겠다는 의지는,
그 무언가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허무는 칼날이 된다.
그 칼날의 숲을 통과하며, 나는 기묘한 내 삶의 법칙을 터득했다.
포기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자유가 왔고,
잃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기특하게도 나를 찾아왔다.
지금부터
세 가지 이야기를 짧게 써보려 한다.
‘날씬한 몸’의 판타지를 찢다.
한때, 내 식탁에는 숫자가 함께 동석했다.
한입을 삼킬 때마다 칼로리를 계산했고,
살이 찔까 물조차 적게 마셨다.
칼로리를 제로로 만든다는 마법의 알약도 쟁여둔다.
하지만 물 먹은 솜뭉치같은 살들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뭣이 중한데?' 싶었다.
억지로 삼킨 배고픔보다,
차라리 기꺼이 삼킨 음식이 낫겠다고 느낀 날,
나는 날씬한 몸의 판타지를 찢어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날씬한 나만을 인정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그날부터 열흘, 하루 다섯 끼를 먹었다.
아무 죄책감 없이, 따뜻한 고봉밥을 뚝딱 비우고
쫀득하게 늘어나는 초코파이마저 우걱우걱 씹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내 몸에 자유를 선물하자,
이상하게도 체중이 줄었다.
옷이 헐렁해졌다.
내가 먹은 게 다 어디로 갔지?
아마도, 내가 찢어버린 판타지의 틈 속으로 사라졌나봐.
욕심을 내려놓자
몸은 가볍게 웃었다.
나를 벌주던 식욕이,
어느 순간 나를 돌보는 자비가 되었다.
‘을의 자리’에서 걸어 나오다
사랑을 사랑하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먼저 그를 궁금해했고,
읽씹에도 드라마틱한 사연을 만들어 주었고,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내 하늘의 날씨가 바뀌었다.
사랑보다 더 큰 건 없다고 믿었던 내가,
그 사랑이 나를 비루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마음에서 먼저 이별을 고했다.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고, 사랑받기를 포기했다.
그렇게 그 사람을 홀로 보내니,
기묘하게도 그는 다가왔다.
연락이 내게 먼저 닿았고, 오히려 애틋한 눈빛은 별첨이었다.
그때 알아버렸다.
애절함으로 그대를 잡을 수 없음을.
사랑은, 사랑이 전부가 아닐 때 비로소 깊어진다.
내가 나를 구했을 때
그도 나를 찾았다.
절절함은 벽이었고
무심함이 문이었다.
‘경력’의 외줄타기에서 뛰어내리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는 독립영화감독이었다.
내 이름 앞에 붙은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어느새 나를 지키는 방패이자,
스스로 휘두르는 완장이 되었다.
프레임 안에 사람을 담고,
시나리오 속에 세상을 농락하며
얼굴없는 손가락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달렸다.
작은 영화관에서 GV를 하던 날,
마이크를 들고 관객 앞에 앉으니
조명이 내게 쏟아졌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무언가 된 듯했다.
그러나 불 꺼진 영화관을 등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밤거리,
나는 이상하리만치 공허했다.
성과는 있었으나, 서사는 없었다.
7년을 섬에서 살아온 내 삶의 숱한 에피소드는 모두 껍데기였다.
내 안의 이야기는 바닷물을 들이 마신 듯 점점 갈증에 메말랐다.
그 후 나는 모든 필모그래피를 던졌다.
통장에 잔고는 없었다.
마트에서 1500원짜리 두부를 샀고, 이틀간 먹었다.
‘그냥 글만 쓰며 살까?’
무너진 듯 누운 그 바닥에서,
비로소 삶이 나를 또 다시 일으켜 세운다.
출근도, 명함도 없이 시작한 글쓰기.
지나간 세월 다 흩어버리고 휘갈겨 쓴 이력서.
탄 맛나는 베트남 커피를 홀짝거리며 흘려보낸
나에대한 단어들이 문득 다른 인연을 데려왔다.
두부가 아닌 고기를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데려왔고,
나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세상을 데려왔다.
나는 그렇게 7년의 섬에서 나왔다.
감독이 아닌 나로
서사 없는 삶을 선택했을 때
내 삶이 하나의 서사가 되었다.
포기한 채 뛰어내린 건 10년의 경력이었고
떨어진 바닥에서 주워 올린 건 '나'였다.
이제 나는 안다.
가장 원했던 것들이
가장 필요 없는 척할때 다가왔고,
가장 간절했던 것들이
놓아준 후에야 나를 바라봤다는 걸.
‘포기’라는 단어가 주는 해방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다.
붙잡고 있는 손을 놓는 것만으로,
삶은 내게 박수를 쳐준다.
35년의 지구살이에서
내가 깨달은 우주의 법칙하나는
'끌어당김'을 거꾸로 메달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What a Beautiful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