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다시, 새로운 프리스쿨로
프리스쿨을 그만두기 직전,
쓰리(3) 폭탄처럼 몰아쳤던 3주가 지나갔다.
첫 번째 폭탄은 수족구였다.
첫째가 입 안과 손발에 퍼지는 발진과 통증에
하루 종일 힘들어했다.
며칠 뒤, 둘째에게도 증상이 나타나면서
기다리던 MRI 일정은 결국 취소됐다.
다행히 둘째는 경미하게 지나갔고,
첫째도 며칠 고생 끝에 나아졌다.
겨우 숨을 돌리려는 순간,
두 번째 폭탄이 터졌다.
나와 딸아이의 머리에서 ‘이’가 발견된 것.
믿기지 않았지만, 현실이었다.
서캐 제거약을 바르고, 금빗으로 매일 꼼꼼히 관리하며
며칠 동안 진짜 전쟁을 치렀다.
결국 치료도 잘 끝났고, 지금은 다 나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둘째의 혈관종이었다.
다행히 이건 희망 섞인 변화였다.
아주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퍼런 자국이 연해지기 시작한 것.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약이 듣고 있구나’ 싶어 마음을 다잡게 됐다.
그렇게 세 가지 큰 파도가 지나간 어느 날,
프리스쿨 원장님에게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여름 세션에 스태프가 부족하다며
도움이 가능한지 묻는 전체 공지 이메일.
나는 그때 마침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고,
아이들도 집에 있어야 했기에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었다.
“타이밍 최고예요. 저 정말 일하고 싶어요!”
바로 회신을 보냈고, 그렇게 다시 프리스쿨에 출근하게 됐다.
조건은 정말 좋았다.
근무 시간은 짧고, 시급은 더 높고,
무엇보다 아이들 학비가 면제라는 점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등하원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큰 안정감이었다.
그리고 그제, 드디어 첫 출근을 했다.
자녀들과 함께 아침 일찍 도착해
첫째는 제일 큰 형아반으로,
둘째는 유아반으로,
그리고 나는 영아반으로 출근했다.
내가 맡은 반에는
돌이 채 안 된 아기들 다섯 명이 있다.
작고 따뜻한 손, 가끔씩 터지는 웃음소리,
그리고 꼭 안아줘야만 잠드는 모습들.
짧지만 진한 돌봄의 시간이었다.
9시부터 1시까지,
정신없이 바쁜 네 시간 동안 마음이 단단히 채워졌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일을 마치고 내 아기들과 함께 퇴근한다는 것.
“엄마랑 같이 출근하고, 같이 퇴근해.”
이 말이 우리 가족의 일상이 된다는 게
이렇게 따뜻할 줄은 몰랐다.
짧은 근무, 높은 시급, 아이들 학비 면제,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아침과 오후.
이보다 더 좋은 일과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첫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퇴근하려던 찰나,
원장님께서 나를 불렀다.
“잠깐, 알려드릴 게 있어요.”
하시더니,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진짜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려가는 것보단 올라가는 게 좋지요.”
라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그렇게, 다시 워킹맘 생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