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82년생 김철수
82년생 김지영 (나는 초큼 더 언니지만..)
10년 이상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실장님. 과장님. 선생님 소리 듣던 '82년생 김지영'들은 가정에서 동네에서 완전히 계급장 떼고 누구 엄마로만 붙는다. 누구 엄마로 맺는 관계들은 어쩐지 회사생활과 달리 몹시 불합리하고, 불리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런 일들은 출산 우울증. 육아 우울증. 주부 우울증으로 연결된다. 그런 증상들이 병원 갈 정도는 아니더라도 심각한 무기력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평정심을 잃고, 내가 알던 나와 다른 처음 보는 나를 자꾸 마주하며 나에게 실망하고 자존감에 스스로 스크레치를 내기 시작한다. 그것도 모자라 난데없이 생전 처음 듣는 호칭으로 불리는 날이 닥쳐온다 '아.줌.마'
'애기 엄마' 까지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지나가는 할머니, 초등학생, 마트 계산대에서 예고도 없이 나를 향해 날아와 내 좌심실과 우심실 딱 중간에 박힌다. 그 충격 속에서 휘청 거릴 시간도 없다. 바락 바락 대들며 엄마 탓하는 애들을 보면 아줌마 노릇도 보람 없고, 어쩌다 늘어진 남편의 이기적인 꼴도 보기 싫어진다.
그런데... 82년생 김지영만 그렇게 힘든 건가? 나의 남편 82년생 김철수는 마냥 안녕한 건가? 82년생 김지영의 페미니즘 비판에 동조하며 발끈발끈하다가, 문득 남편을 보니 갑자기 무슨 무속인이라도 된 듯이 남편의 심정이 안타까워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우리 집 82년생 김철수( 남편은 초큼 더 형아지만.....)
3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첫 테이프를 잘 끊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죽어라 공부해서 겨우 겨우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신세계다. 그런데 동아리며, 축제, 배낭여행, MT까지 대학생활 제대로 만끽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런 좋은 시절이 다시없을 줄도 모르고... 철수는 사나이답게 해병대 수색대에 들어가 폼나게 전역해서, 돈은 없지만 카리스마가 폭발하는 복학생이 되어 컴백하겠다고 다짐하며 입대했다. 그런데 막상 해병대 훈련소에 들어가 보니 약간 쫄린다. 수색대 자원에 손을 못 들고 애매하게 해병대 운전병이 되고 만다. '해병대 운전병 김철수' 철수의 인생은 참 오랫동안 이 애매한 포지션을 유지하게 된다.
'졸업하고 할 일 없으면 공무원이나 되지' 하던 시절이었다. 4년제 나오면 무조건 대기업은 골라 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해병대 운전병 복학생이 졸업하던 해부터 일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IMF
대학만 졸업해서 대기업 못 들어가면 공무원이나 하던 시절이 딱 철수 한 발 앞에서 닫혀버렸다. 그래도 성실하게 공부한 결과 공무원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한 해병대 운전병 출신 철수는 2:1 경쟁률의 2차 면접에서 당당히 탈락하고 만다. 너무 부끄럽고 당황한 철수는 다짜고짜 상경하여 중소기업에 자리를 잡고 아주 깊은 동굴에서 숨어 지냈다. 그 동굴 속에서도 잘한 일이 있다면 김지영의 손을 놓지 않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것이다.
김지영과 같이 벌고 같이 쓰며 철수는 아주 잠시 자신의 동굴을 잠시 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다 결혼 5년 만에 아주 아주 힘들게 찾아온 아기.
그때부터 판이 이상해진다. 양가 부모님 모두 지방에 계시고 둘 중 하나는 아기를 키워야 한다.
경력이 더 많은 김지영의 수입은 400만 원.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중소기업의 회사원인 철수의 월 수입은 200만 원이었지만 사회통념도 있고, 근무의 지속성, 육아의 전문성을 고려해요 철수가 계속 직장을 다니고 일단 마누라가 육아를 담당하기로 했다. 일단... 일단은 일단이니까...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가장"이라는 멍에가 씌워 덜컥하며 채워졌다. 아들의 미래, 우리 집의 경제, 우리 부부의 노후까지 한꺼번에 몰빵으로 쏟아졌다. 이 속도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철수는 깜짝 놀라서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다. 일단 혼자 벌어보기로 했던 일단은 그냥 당연한 일이 됐고,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즈음 우리 집 김지영이 육아기를 끝내고 복귀하려고 일어서는데... 그만 둘째가 생겼다.
맞벌이는 또 물 건너갔다.
그렇게 10년을 달렸는데 끝이 안 보인다. 아직 중간도 못 온 것 같다. 정말 빨리 가도 20년은 더 달려야 할 것 같다. 더 절망적인 것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달린 것 같은데 앞서가는 사람들 뒤통수만 보이고 추월할 힘이 나질 않는다. 안구건조증, 고혈압, 골반 통증, 어깨 결림, 만성피로는 남들 다 시달리는 거니까 티 낼 일도 아닌 거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삼신할머니가 못되게 구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아가... 그 나이 때 다 그런 거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단다."
82년생 김지영 참 애달프다. 되돌아보면 아찔 할 정도로 힘든 육아기를 지나왔다. 육아기 김지영은 모두 그렇게 힘들지만, 힘들다고 꼭 나만 가엽게 여기고, 그래 달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우리 집에 김철수도 참 힘겹게, 가엽게, 기특하게, 장하게.....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