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산, 또 산
공공의 득인지 독인지 분간도 못한 채 단체활동 중에 해는 바뀌었다. 대학생이 된 막내마저 집을 떠난 당산 아래 첫 집에는 처음 살림 나던 그때처럼 남편과 나만 남았다.
그 무렵 동네 안은 두세 집 건너 한집씩 비어가더니 급기야 흉가가 되던 중이었다. 소리가 시끄럽다느니 전자파가 피해를 준다느니 그런 풍문 아닌 풍문을 몰고 온 날벼락이 눈앞에 놓인 것이 아닌데도 점점 마을은 사람들이 줄어들어 갔다. 마을 입구 개울가로 심은 벚나무가 자라서 봄이 되면 꽃길을 이루고 있어 마음을 조금은 누그러뜨리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변하지 않는 듯 조금씩 달라지는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을 아주머니들로부터 거듭 제의가 들어왔다. 마을 내에 부녀회가 존재하는데 젊은 사람이 없어 세대교체가 필요하니 문자로 안내하고 모임 때 회비만 거두는 역할이라도 해 달라며 총무를 맡아달라고 했다. 집안에서의 위치나 건강 상태마저 엎치락뒤치락 불안함의 연속인데도 마을부녀회 전 임원진으로부터의 구애작전은 몇 달이나 이어졌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중에 마을 행사가 있을 무렵이었다. 평소 주머니 열기가 하늘 별따기 같던 남편으로부터 금일봉의 봉투가 주어지면서 마을일을 해보라는 응원까지 받아 기어이 몇 달간 빼던 총무직을 수락했다. 그때부터 이전에 보이지 않던 마을 상황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그저 마을 아주머니로 통징하고 지냈었는데 택호라 하여 그 집 안 어른의 친정이 어느 곳인지를 알게 되고 또 농사의 규모나 건강 등 가족동향을 알아가게 되고 뒤이어 그 댁 자녀들의 근황도 하나 둘 알아가고 있었다.
개인 적인 건강과 집안의 안정과 마을이 앞으로 나가야 햘 방향까지 나약한 마음과 몸으로도 촉수를 올려 살피려 하니 역부족이라 종종 기도에 의지했다. 어쩌면 별로 내세울 것도 없지만 먼저 보는 눈을 가진 그 달란트를 써보란 뜻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때부터 모임의 횟수와 회비등을 정하고 규칙적인 모임으로 바꾸어 나갔다. 이전에는 어버이날 행사 때 음식 준비를 하고 그때 남은 찬조금을 모아 두었다가 마을 내의 요긴한 일에 사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마을 내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였다.
집안에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면서 마을의 일을 보게 되니 쓸모가 있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개운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니 몇 해뒤엔 기어이 부녀회장이란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마을 내 빈집이 헐리고 새집이 들어오기 시작한 뒤였다. 조심스레 올리던 기도의 응답이 오나 싶었다.
호사다마이던가? 빈집이 헐리고 새집이 들어서는 기쁨도 잠시 넘어야 할 산이 또 나타났다. 이번엔 세계적이었다. 코로나19가 지역에도 조심스레 번져갔다.
한마디로 코로나19를 어떻게 벗어나느냐란 숙제가 주어졌다. 그것도 할 일은 있으나 해낼 힘은 없는데도 뭔가를 해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