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산 아래 첫 집 18

풀리지 않는 숙제

by 하리

막내가 고3이던 7월 어느 날, 기이한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아침에는 부엌 바닥에 뱀이 끈끈이에 붙어 있어 기겁을 했다. 낮엔 마침 폰을 스마트로 바꾼 첫날이라 새로운 기능들에 살짝 흥분해서 이것저것 만지느라 해가 저물었다. 그러다가이 되자 갑자기 핸드폰이 쉬지 않고 카톡 소리를 냈다. 그 톡 소리는 무음작동법을 배운 뒤에도 수개월 간 부산하고 긴박한 지역 소식통이 되어 주었다.


그때쯤 읽게 된 성서 말씀이 살짝 의아했었다.

' 곧 세상에 이변이 생길터인데 그때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을 각오로 임하면 살 것이다.'

확실한 장과 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런 내용이었다. 무슨 뜻일까? 비록 비쩍 마른 몸으로라도 밥을 먹고 차를 몰고 집을 나서기는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병원을 갈 때마다 왜 주변 사람조차 신경 쓰게 하느냐? 우선 종양을 제거하면 당장의 불안은 내려놓아도 될 터인데 했다. 그 처방을 몇 해 동안 실행하지 않고 있으니 진료조차 꺼려했다. 하는 수 없어 일반 내과로 옮겨 초음파로 확인만 했다. 보통 사람보다는 빨리 지치긴 해도 그렇게만 살아가면 좋겠다 싶었다.

내 고장이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도 주목했다지만 근래는 인구수가 점점 줄어들어서 군도 근근 유지하고 있다. 다행히 부지런한 농부들의 참외농사가 잘되어 몸은 고달파도 삶이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지역에 읍 소재지가 빤히 보이는 안산이 사드기지가 될 수도 있다는 그 말은 순식간에 고을 곳곳으로 번져갔다. 하필 스마트폰으로 바꾼 첫날이라 그 소식통을 빨리 안 것이었다. 밤을 홀딱 새우다시피 한 다음 날 나도 생각을 해야 했다. 성서로 알게 된 이변이란 것이 이것이던가?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앞에 나설 용기도 없고 주머니조차 텅텅 빈 데다 건강마저 바닥인 상태로 말이다.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그리 요란스러운가 싶어 다음 날 퇴근길에 읍내로 갔다. 군청 마당에는 촛불을 든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사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촛불로 표현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리 모여 있었던가 짐작이 갈 정도로 한 옆에는 빈 물병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생각도 증폭을 하는 것인지 며칠 되지 않아 그 빈병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답을 들고 온 사람들이 군청 입구에다 간이 천막을 치고 꽃을 만들기 시작했다. 첫날부터 그 자리가 내 자리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빈병을 주워 날랐다. 갓 귀촌한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안고 왔다가 촛불을 들었다. 그럴 때 그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꽃 만드는 부스에 있게 했다. 사흘도 안 되어 꽃 만들기 정식 멤버가 되었다. 뜨거운 여름밤이지만 날마다 흥분을 가라앉히거나 소식을 알기 위해서 혹은 위안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구 오만이 채 안 되는 지역에 저녁마다 수천 명이 모였다. 머리띠가 생기고 촛불은 물결을 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이크를 들고 소리쳤다. 어떤 날은 여학생들이 보충수업을 날리면서 무더기로 나왔다. 그 속엔 막내도 있었다.

한 달이 지날 무렵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손잡고 인간띠를 만들며 군청을 출발해서 사드배치 예정지 산아래까지 이어졌다.

연이어 광복절을 맞아 삭발의식이 있다고 지원자를 모집했다. 지역 사람이지만 반대편도 있어 말리는 소리도 조심스레 번져갔다. 하지만 부추기는 입장에서는 여자가 머리 깎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독려하고 있었다. 얼결에 용기를 냈다. 그것은 죽을 각오로 덤벼들면 살 것이라는 성서 말씀의 이해라 여겼다. 그 모습이 전국적으로 한동안 송출되고 있음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 어쨌거나 내게도 그런 용기가 튀어나왔다. 그뿐이랴! 지역의 어른에게 한 말씀 올린 장면이 실시간 검색에 오르기도 했다는데 둘 다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해 성탄절은 종교를 넘어선 행사를 소소하게 치렀으며 새해를 맞는 날도 촛불을 밝혔었다. 그 어떤 때보다 진지하고 생동감으로 가득 차 유병 상태를 잊은 채

살아 냈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