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우리 가족
아이들은 날마다 마음과 키와 성적이 오르고 있었고 남편의 피부는 맑아져 가며 시부모께선 매주 가족 등산에 합류했다. 덩달아 내 몸 안의 종양도 멈춤 상태였다.
각자 하나씩 양보한 끝에 주어진 평화로운 상황이었다. 다년간 아버님의 호기로운 선택으로 인해 흐리던 집안의 먹구름이 걷혀가고 있었다. 매주 등산은 그간 쌓인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지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종교가 달라 불편하던 것도 많이 편해졌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각자 할 일에 집중하면서도 같이 해야 할 일 앞에서는 시간을 냈다.
아버님께선 혼자 집을 나서서 취미생활을 계속하다 어둡기 전에 귀가해서 짬짬이 한 일을 찾아 했다. 이른 봄엔 거자수를 받으러 산으로 갔고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나무 묘목을 직접 사서 빈터에 심으셨다. 팔순이 되어도 어머님은 참외 농사를 짓고 벼논과 밭작물을 돌보셨다.
피부병의 괴로움에서 벗어난 남편은 한약 없이도 할 일을 해내었다. 밝음의 마스코트처럼 해맑게 웃는 큰 딸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평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아래 둘은 시험을 치를 때마다 제 성적의 반을 뚝 잘라내고 있었다.
나는 마당가에 잡풀을 뽑고 그 자리에 꽃모종을 하다 보니 피로도가 줄어갔다. 또한 직접 만든 건강 보조식품으로 호전되어 가끔 외식도 가능했다. 그 힘으로 성당에서 어르신 성경학교봉사도 했다.
유병장수시대라 하지 않던가! 아버님께선 심장에 인공시술을 하셨고, 어머님께선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고도 통증 잡는데 3년 걸리긴 했다. 남편 역시 언제 돋을지 모를 피부가려움증을 예방하기 위해 매일 하루 두 번씩 나무뿌리와 잎을 삶아서 씻었다. 내 몸 안에 이상 세포가 자라기를 멈춘 채 평범한 일기장이 차곡차곡 채워 갔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해도 늘 그렇게만 날이 가도 좋을만치 가족이나 아이들은 고맙게도 잘 살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