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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 아래 첫 집 20

성숙은 아픔을 딛고

by 하리


얼결에 마을 내 임원을 맡은 기간이 코로나시절과 맞물려 이전과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 와중에 파도 타듯 아슬하나 신나는 경험을 하는 계기가 주어졌다.


코로나가 막 퍼지고 있는 때의 어느 날 지역 문협 모임을 갔다. 조심스러운 제안으로 나온 것이 마을 안에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돌릴 만한 곳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첫 모임 때는 어쩌다 출석하는 나로선 말을 꺼낼 군번이 못되어 지나갔다. 그다음 주였다. 이번에는 어느 곳에서든지 행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했다. 이미 기획이 통과되어 예산이 세워졌는데 실행할 장소와 사람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라 했다. 그때 조심스레 마을 내 귀촌인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으니 한번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다음날부터 단체 톡에서는 그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나 되는 것처럼 재촉 문자가 자주 들어왔다. 그렇게 얼결에 그만 마을 안에서 문화체험 프로그램은 여름날씨만큼이나 뜨겁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호응하길 기대한 기존의 마을분들께서 시큰둥했다. 모두로부터 좋은 반응을 기대한 것 자체가 착각이었음을 안 것은 나중일이었다.

타 면과 마을에도 입소문을 냈으나 받아주는 데가 없어 졸지에 예술 단체가 다 마을 안에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얼결에 할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느라 집집마다 발품을 팔았다.

그렇게 해서 50대 전후의 젊은 여성팀은 민요와 풍물반을 만들었다. 입구 쪽 뼈대 있는 문중 사람들은 초상화와 문패를 만들기로 약속이 되었고, 갓 입촌한 아저씨 몇 분은 벽화반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꼭 원하는 분들로 이뤄진 자서전팀과 글씨기 반도 결성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단 몇 주만에 돌아간 것은 여름초입이었다.

주말을 제외한 5일간 매일 다른 문화체험 프로그램이 마을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 몰래 기도로 마을을 봉헌한 뒤였으니 좀은 힘들어도 감내해야 했다.

첫 해는 기존의 예술 단체에서 경험 있는 분들이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해 주었다. 그다음 해에는 제안서 발표를 시작으로 강습자 모으기와 강사 섭외는 물론 간식준비와 서류들도 내 손을 그쳤다. 마지막 예술잔치 때엔 공연기획에다 그간 지나온 발자취를 책으로 묶는 것까지 하다 보니 즐거운 만큼 부담감도 컸다.

이후 2년간은 마을 지를 엮어서 조졸하게 줄간식을 가졌다. 그 사이에 코로나는 물러갔다. 하지만 내 몸은 익숙하지 않은 일들로부터의 긴장감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탓인지 더 나빠졌다. 결국은 부녀회장직 또한 중도하차를 하고는 치병자로 돌아왔다.


수년 전 중국에서 배웠다며 강의 한 신부님의 쫄깃한 해석이 새삼 떠오른다.

'보통은 아홉수가 나쁘다지만 자매님은 그때가 가장 길하다오'

내 생의 가장 핫한 몇 년은 코로나시대와 맞물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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