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뜸 대신 고요
일이 있고 없고는 무얼 말할까. 어떤 상황 앞에서 그것을 일로 생각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날까 한다.
공적으로 등록된 직업은 농업인과 문화관광해설사인데 그보다 번번이 다른 일들에 더 마음 뺏기고 혼쭐나게 바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역 내 소란스러움도 비껴 나고 마을 내의 변화시도도 몇 년 해보다가 지쳐갔다. 당연히 몸의 반응 또한 대부분의 수치가 정상을 밑돌았다. 집을 나서는 일들을 다 팽개치지는 못해도 정리를 해야겠는데 도무지 두서가 없었다. 피곤함을 우선으로 치면 그냥 집 마당에서 서성이다가 방에서 쉬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영적인 건강을 위해 신앙생활을 이어가려면 집을 나서야 했고, 또 약간의 경제적인 도움을 위한 해설사 활동도 다 놓을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의 목장 일이 아이들이 한창 대학생활을 하던 십여 년 간은 어느 정도 순환이 잘되었다.
남편 덕분에 건강 회복을 위해 일 년 여 해설사 활동을 쉬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친 코로나시대와 맞물려서 혼자만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마당에서 꽃을 보다가 풀을 뽑고 텃밭에서 멍 때리다가 무얼 심어볼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반응애도 어떨 땐 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을 넘어서서 보통사람들보다 오래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음도 깨달았다.
발병 이후 오래도록 몸을 움직여서 무언가를 한 뒤에 돌아오는 기쁨을 맛보려 하기보다 그냥 복잡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벗어나기 위해 약간의 힘만 있어도 집을 나서던 나였다. 해결이 아닌 도피 같아서 내 안의 자아는 자라기보다 멈춘 채 계속 포장지를 덧씌우는 꼴이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생각을 무시하기보다 나 스스로라도 알아채야 했다. 갑갑하고 속상하고 마음 날씨가 우중충하면 잠시라도 몸을 움직이는 연습을 했다. 손발을 흔들거나 마당에 나서서 풀을 뽑거나 때로는 일기장을 펴 놓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그냥 두드렸다.
그 몇 년간의 일기가 별 쓸모가 없었을까? 분명 내겐 치유에 도움이 되었지 싶은데 어느 순간 보니까 다 날아가고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하고 아까웠다. 그다음 느껴진 내면의 소리는 아마도 잊는 것이 나아서였나 했다. 많이 울적했으나 살아낸 것만으로 충분하다 했다.
코로나시대가 물러가고 다시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자면 다 죽어가는 모양새였단다. 그렇지만 나는 또디시 움직였다. 이번엔 적어도 농부 흉내내기는 제대로 할 작정으로 텃밭의 크기와 작물의 숫자를 올렸다. 그리고 자주 텃밭에 나섰다. 그다음 문화관광해설사로서 마음가짐이라도 일단 사람 앞에서 밝은 마음과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웃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던 팔자 주름도 주춤 멈춘 것 같다. 무엇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알아차림으로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내 삶은 하나도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구름을 보면 구름이 보이고 사물을 보면 그 사물 앞에서 잠시 머물 여유도 생겼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