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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 아래 첫 집 25

감사는 으뜸

by 하리

삶 중에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늦게야 배워가고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 옹알이를 시작으로 걷고 말을 하는 데 좀 더뎠거나 말거나 성장하며 살아왔다. 그때그때 사람들의 마음과 노력으로 자랐고 또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왔다. 때론 내 능력의 이상을 바라다가 그것이 욕심인 줄 모르고 애태웠으며, 어떨 땐 그 욕심에 휘둘려서 내 영혼까지 좀 쓰는 줄도 몰랐다. 그저 지금 숨 쉬고 있음이 감사한 일임을 안 것은 순전히 저승문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의 건강상 제동이 걸린 이후이다.


"죽는 게, 뭐 겁나냐?"'

암 진단 후에 보인 남편의 반응이었다. 물론 엄청 혼란스럽고 아프고 슬프고 힘들었던 때에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우아노?, 치료하면 된다 카드나?' 정도이길 바랐다. 더 나아가'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내 짐 보따리 내놔라'는 비유까지 들먹였다.

그렇다고 평소에 아주 형편없는 망나니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안에 떠는 내게 그 말은 두고두고 나를 아프게 했다. 서럽고 서러워서 한마디로 살기가 싫었다.

그러구러 아슬아슬하게 해가 가더니 강산도 변해갔다. 그때쯤 주변을 돌아보니 남편보다 더 냉정하게 대하거나 나쁜 상황은 많았다. 때로는 도와주는 척하면서 뒤통수치고 도망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적어도 남편은 아픈 나를 버리겠다는 마음까진 먹지 않았던가 보다.

우여곡절 끝에 몇 달간 요양 비용은 주었다.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었다. 요양을 위해 집을 비운 동안에 스스로의 불안감을 없애거나 희망사항의 바람이었거나 주변의 돌멩이로 집 앞에다 돌탑을 쌓기도 했다. 비록 옆구리를 찌르긴 했지만 춥기 전에 가족과 함께 황토방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남편의 '죽는 게 겁나냐?'는 말 한마디에 내 영혼이 송두리째 흔들려서 실제 몸 상태보다 마음이 훨씬 더 아팠었다. 하지만 그 말인 즉, 늘 기대기만 하려 했던 내 마음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묘약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남편이 나를 보호하고 도와줄 줄 알고 기대는 내 마음의 실체를 본 것이었다.

그 말이 곧 나 스스로 바닥을 치고 혼자 일어나게 하는 명약이 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수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어떻게든 내 몸과 마음의 문제를 나 스스로 풀고 이겨낼 방법을 하나 둘 터득하며 삶을 살아내고야 깨달은 것이었다. 바로 내가 처한 모든 삶의 순간이 감사한 것이었음을 말이다.

돌아보면 나는 감사하는데 무척 인색했던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비교하고 또 나를 비하했었다. 자연히 웃기보다는 고민에 휩쓸릴 때가 더 많았다. 조물주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기뻐한다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사는 하루하루를 소풍같이 즐겨라는 표현도 남의 일이라 여길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맞고 보내고야 알게 된 것이었다.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마리를 하나씩 잡아당겨가며 부끄럼을 무릅쓰고 글로 풀어가다 보니 남 탓 보다 내 탓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감사야 말로 진정한 항암이요, 삶의 윤활제라는 것을 늦게야 알아가고 있는 늦깎이 철부지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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