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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산 아래 첫 집 23

홀로 대신 더불어

by 하리

살다 보면 예고치 않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다. 그때마다 순간적인 느낌으로만 정하면 오래지 않아 후회가 따랐다. 대신 기도와 더불어 심사숙고한 결정은 후회가 적었다.


49세 암 진단 후 한동안 어디서 지낼까? 갈등이 많았다. 다행스럽게도 기도를 하며 선택한 판단이 옳았던 건인지 봄에 나섰던 집에서 가을초입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한 번씩 검진차 주치의를 만나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느냐?'며 놀라긴 했다. 하지만 실제 노력이란 것이 내 역할을 좀 더 하리란 다짐이 우선이었다. 그저 좀 더 먹을 수 있고 잘 싸는 일에 조금씩 알음알음으로 노력한 것뿐이었다.

그러구러 강산이 한번 바뀔 무렵에 또다시 선택의 기로가 주어졌다. 갑자기 더 커져버린 종양 때문이었는지 하루 종일 피로에 지쳐 있었다. 아니, 마음이 먼저 혼란스럽고 평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지만 검진 결과는 나빠져 있었다. 주치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수술 의사가 자기 아니라도 좋으니 즉시 제거하라 하고는 앞으로 자기에겐 오지 말라고 했다.

채 정리되지 않았지만 몇 년간의 안정적인 생활에서 이탈한 상태로 앞날을 어떻게 살 지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럴 때 남편이 내게 제의하기를 강원도 설악산 근처 오색약수터 주변에 위치한 자연 치유집을 권했다. 그곳에 가면 얼마간은 비용을 대 줄 터이나 나 스스로 다른 결정을 하면 일 푼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의 하루가 걸리는 거리를 몇 번 갈아타고 갔었다.

하지만 그곳 또한 숙식 이외에 기타 노력은 스스로 해야 했다. 또한 함께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추가 비용이 만만찮았다. 며칠 되지 않아 식사 이외의 간식이 없다 보니 운동 삼아 좀 걷고 나면 이내 배가 고팠다. 몸무게가 집에 있을 때 보다 더 빨리 빠졌다. 어떻게든 잘 이겨내 보자는 마음보다 집에 있는 아이들이 더 보고 싶었다. 열흘을 간신히 채우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남편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하루를 살아도 집에서 지내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거의 종일 집에서 머물다 아주 조금 올라오는 힘으로 뒷산 언저리까지 걸어갔다 오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돗자리를 들고 중턱쯤에 있는 소나무 아래에서 한 나절씩 쉬다고 오기도 했다. 몇 달을 그렇게 하다 보니 읍내에 내려갈 수 있을 만치 힘이 났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병원행이나 기타 처방 없이 또다시 일상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혼자 살아나야지 하는 마음보다 같이 살아가겠다는 마음이 가상 해서였을까? 조물주께선 내게 또다시 살아낼 힘을 주셨다.


첫 진단 때 갓 중학생이던 막내가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다 떠난 집에서 남편과 단 둘 뿐인 밥상을 어떻게든 차려내였다. 내 삶은 또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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