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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물안궁의 삶 Aug 20. 2024

엄마와 가장 닮아있는 사람

엄마와 나 사이에 '소통'이라는 단어는 참 생경했다.


복종으로 귀결되는 말 잘 듣는 딸이자 친자매인 언니보다는 이른바 한 성깔 하는 사람이지만 언니가 무언가를 잘못해 엄마에게 혼날 때마다 그 성깔은 시원스러움이라는 얼마 못 갈 칭찬의 가면을 쓰고, 내가 잘못한 일로 혼날 때면 신경질적이고 방정맞은 본래의 성격을 되찾고 마는 여자 , 20년 전의 십 대가 여기에 있다.


엄마와 대화가 통화지 않음을 넘어 단 세 번에의 왕복 대화 노선조차 거칠 수 없음을 알게 된 건 스물여섯 살 때였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부고로 준비조차 없이 가장이 된 나는 모든 결정에 있어 엄마의 의견을 최소한으로나마 구한 뒤 '협의 및 논의'라는 형식적 절차를 구해야 했다.


 밖에 남지 않은 가정에 '협의 및 논의'는 사실상 우리 집 여자들 중 그나마 사회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현실 감각 있어보이며 그와 동시에 재정수입이 있는 나의 권한이자, 엄마이기에 존중하고 예우하는 차원에서의 형식적 절차에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1년 2개월 만에 그 딸은 집을 나와 고시원에서 살기에 이른다. 약 두 달이었지만 그 기간동안 만큼이라도 싸우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가끔 애틋해 하기도 하면서.


다시금 같이 살게되면서 불통이란 단어조차 떠올릴 수없을 정도로 금이 가있음을 모르고 살았던 이십여 년간의 나의 무지와 무능을 탓하며 어떻게든 회복해보려 했지만 준비, 고민 는 회복을 위한 노력은 더 깊은 관계의 수렁으로 빠질 뿐이었다. 결국 그 올가미를 떨치다 시피 나는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일구며 엄마는 함께 살던 집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래도 딸로써 최소한의 본분을 하고자 분가하며 몸은 떨어져 있지만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최대한 엄마를 봉양했고 현재도 그렇게 살고 있다. 수년간의 불화를 통해 깨닫게 된 건 나와 엄마는 절대 이상적인 모녀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 엄마의 아픔이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없다는 것. 그 과정에 이르기 전 내뱉는 말 하나하나 의미 부여해가며 생기는 오해를 한 가닥씩 풀어야 하는 고통의 과정을 계속 거치기엔 나도 지켜야 할 가정이 있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내 삶의 위치에서의 깊은 고민들이 있기에 물리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더 이상 살부대 끼며 살고 있는 만큼의 고민을 해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결국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관계가 되기로 한다.

어쩌면 우리 모녀에게 딱 맞고 다투지 않고 불화를 막으며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서로 깊은 곳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건강과 현재의 의식주를 챙기는 말들과 자식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나가는 것. 그 이상의 고민은 서로에게 과잉이라 여기는 것. 그러면 우리 모녀의 사이가 더 악화되지는 않을 테니까. 적어도 극심한 불화에서는 구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헛헛할지라도.





 

그렇게 스스로의 안위와 새롭게 꾸린 내 가정에의 안정이 최상의 목표가 되어 살아간지 수년쯤 흘렀다.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 자꾸만 투영하게 되는 모습들. 그래서 엄마에게 고마웠던 기억보다 내가 엄마가 되는 세월이 길면 길어질수록 나의 엄마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일이 많았다. 구렁텅이에 빠져 과거의 기억들이 증오가 되어버릴 때 즈음, 더 이상 남아있는 증오 따위는 더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증오는 계속해서 상대를 탓하게 하는 나쁜 습관을 남기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조차 점점 약해지게 만드는 데에 큰 재주를 지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빼박은 나를 발견하게 되고 악을 쓰며 떨쳐내려 했지만 기질까지 바뀔 순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저 후천적 노력으로 연습을 통해 엄마와는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쯤은 가능하게 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그런 엄마와 수개월만에 만나 자식 된 도리를 한다며 식사대접을 했다. 같은 서울 땅에 살면서도 자가용으로 1시간 1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살다 보니 한 끼 식사 약속을 잡아도 한나절은 필요하다. 그래서 내게 엄마를 보러 가는 일은 심리적, 물리적 용기가 필요하다. 엄마의 어떤 말을 듣고도 가슴이 쿵쾅거리지 않을 용기, 내 생활을 지키면서도 한나절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만큼 내 마음상태가 괜찮도록 유지하기 위한 사전의 노력들. 뭐 대단한 의전이 필요한 거물급 인사를 모시는것도 아니거니와 표현은 거창하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뭇 모녀와는 다르다. 아주 다르다. 그런 관계를 궁금해하는 제3자를 이해시키는 일도 버겁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내 마음처럼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를 만나서 나눌수 있는 이야기는  종교 뿐이다. 종교이야기를 하면 최소한 그 마무리가 최악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엄마가 의지할 건 종교밖에 없다. 가끔은 그래도 이단에 빠지지 않아 다행인 엄마에게 종교라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도 엄마의 종교를 존중하고 나도 과거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왔고 하고 있다. 중간에 빌어먹을 회의감에 허덕이던 시기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웃종교 언어로 그런 나의 간증과도 같은 종교에의 생각을 엄마에게 이야기하자 엄마는 그제야 비로소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딸의 신앙상담까지 해주기에 이른다. 그리고 엄마에게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


"우리 불교이야기 하니까 정말 소통이 되는구나.. 시간이 빨리 가는 게 아쉽다. "

 

'소통'이라니, 우리 사이에 '소통'이라니. 그것도 엄마가 내게 먼저 꺼낸 말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사실은 다행이기도 했고.

나는 엄마가 미웠다기보다, 엄마가 싫었다기보다 서로 너무 다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숱한세월 살았고, 어린 시절부터 대화보다는 일방적인 관계로서만 지내다 보니 서로 간의 문제해결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마음에서 비롯된 그래서 종교적 신앙을 통해 내면의 힘을 쌓고자 할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연락한다. 자문도 구한다. 불교에서의 기도, 수행에 있어선 엄마가 훨씬 선배니까.

불교이야기를 하면 엄마와 진정 대화가 된다. 남들이 생각하는 그 의미의 소통이 된다. 종교활동, 신앙에 있어서 부족한 점을 엄마에게 내보인다. 엄마는 나름의 처방을 내려준다. 그에 맞게 잘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때때로 전한다. 엄마는 내게 무언가 도움이 된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에의 성취감도 느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녀는 누구보다 많이 닮아있다.

극도의 예민한 성향과 종교를 바라보는 마음, 신앙에의 정도까지도.


둘만의 문제가 또다시 생기더라도 불교적 관점에서 투영하고 생각해서 서로에게 표현한다면 그 문장이 더 온화해지고 간결해진다. 그렇기에 전처럼 싸울 일은 더 이상 없어진다. 그런 과정을 겪고 느끼고 있다. 고맙다는 말, 엄마는 참 대단하다는 말, 엄마 덕분에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했던 2~3년 전부터 가족에의 불화에 대해서만 수십 개의 글을 써왔던 내게도 봄 같은 날이 왔다. 세상 행복할 만큼의 관계는 아니지만, 우리는 이제 공통점을 정확히 찾았으며 그것을 매개 삼아 소통하는 방법을 익혔다. 천군만마를 얻은셈이다. 적어도 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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