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업진언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사바하~ 불교에서 모든 경전을 읽기 시작할 때 무조건 맨 앞에 나오는 구절이다. 세 번을 읊어야 한다.
정구업진언은 경전을 읽기 전 입으로 지은 업을 참회하며 내 입을 먼저 깨끗이 한 후 경전독경을 시작하겠다는 의미이다.
의미만 생각해 보자면 나는 세 번 아니라 삼만 번은 외워야 할 것 같다. 누군가를 험담한 죄, 욕설을 뱉은 죄, 일상을 푸념이나 부정적인 말들로 채운 죄 등등.. 삼십팔 년간 지은 구업이 끝도 없다. 알고도 지은죄가 더 무섭다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중처벌감이다.
내일은 내가 계획했던 기도의 마지막 날이다. 불교에서는 백중기도라 하여 음력 7월 15일까지 총 7번에 걸쳐 초재~7재에 이르기까지 조상 및 나를 위한 기도를 한다. 나를 위한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기 전에 내 뿌리를 생각하고 나의 근본을 생각하다 보니 세상에 안 계신 내 아빠에 대한 마음에의 매듭을 짓는 행위가 무얼까 생각한 끝에 마침 그 시기가 여름에 접어들고 있는 6월 중순, 말경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백중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에게 기도란 것은 거창할 것이 없었다. 일상의 시작 또는 끝무렵 30분~1시간 정도 시간 내어 경전을 읽어 내려간다. 보통 아침, 새벽시간이 가장 맑은 정신상태에기에 그 시간대를 선호했는데 간혹 늦게 깨는 날이면 출퇴근길 또는 잠들기 전 이불 위에서 읽는다. 어떻게든 밀리지 않고 꾸준히 하고자 노력했다.
경전은 포켓용 작은 경전을 구입했는데 아주 요긴했다. 이 경전에는 오타가 간혹 보이긴 하지만 어떤 스님이 수작업으로 만들어 판매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수제 한정판 경전을 얻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 오타를 발견해 낸 나 자신을 이른바 찐불자라고 인정해 주게 된다. 하하. 오래 읽으면 읽을수록 경전종이가 말린다거나 손때가 묻어 꼭 절에 가면 있는 노보살님들의 세월이 묻은 경전의 느낌도 든다. 이제 몇달 안됐지만 수십세월 기도한 내공있는 보살님 느낌으로다가.
하루 내 생각을 정리할 잠깐의 시간조차 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싱글로 살아가는 독립된 자아든, 가족과 함께하는 엄마의 위치에 있든지 간에 마찬가지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 행위를 바라야 하고 내게 소중한 것이어야만 일상의 한 조각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하는 일상이 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길 바랐고 마음의 힘이 생기길 바랐다.
나는 전 직장이 불교계 신문사였다. 퇴사한지 일년반이 지났음에도 돌이켜 보면 실망할 일도 많았고 스님 같지 않은 스님들, 정치판보다 더 심한 인간에의 모습도 9년간 매일 봐온 터라 어린 날부터 불교와 인연 맺어 살아온 내 지난날이 무색할 정도로 불교에 회의감도 느꼈었다. 생각해 보면 불교에 대한 회의감이 아니라 어느 한 집단에의 불교답지 않은 모습에의 환멸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어쩌면 그럴수록 더 불교에 귀의했어야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내 마음을 다잡아주는 마지막 행동이 기도라는 걸 보면.
지금 생각해도 불교는 참 과학적인 종교이니까. 물론 타 종교를 비방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타 종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심한 회의감과 화 탓에 전 직장을 퇴사하면서 갖고 있던 경전들, 작은 조형물, 단주도 죄다 버리고, 불교와 관련된 모든 물품들을 내 시야에서 치웠었다. 그리고는 종교를 업을 삼아 살아가는 일은 다시 없을거란 다짐과 함께 꼭 경전, 물품, 절, 형상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일으켜 세워보겠다 다짐했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 중생 중의 중생이었다. 결국 경전도 다시 구입하게 되고, 기도라는 행위를 통해 힘을 얻는다는 것이. 좋은 일이고 다행한 일이지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각자의 근기에 맞는 방법으로 가르침을 전하겠다고 오셨다고 들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거기에 딱 들여 맞는 중생 중에 중생이었을 뿐이고.
오늘 하루는 기도 회향 하루전을 맞아 내 몸과 마음을 좋은 것으로 채워보고자 했다. 뭔가 대단한 회향을 생각한 건 아니지만 , 약 두 달 가까이 쉬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 기도, 독경을 이어온 것에 대한 성취감. 그것을 가장 만끽할 수 있는 건 내 마음과 머릿속에 좋은 것들을 넣는 일 말고 없는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법문이라 하면 법회에 직접 참석해서도 들어봤고 엄마가 카세트테이프를 틀면 집안 곳곳에 퍼지는 법문소리들로도 익숙하다. 그간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성인이 되어 인생의 쓴맛을 어느 정도 겪고 난 뒤에 듣는 법문은 정말 가뭄에 단비 같았다. 내 마음이 암만 노력해도 왜 그리 갈팡질팡 기복이 심했는지 느끼게 되었고 답을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심리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스님의 차분하면서도 강단 있고 힘 있는 목소리에 내 마음마저 그리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 같으면 난 왜 유튜브만 보면 허송세월 보내는지 싶겠지만 오늘은 모처럼 나의 갤럭시패드가 제값을 한 날이다. 스님의 법문을 약 여섯 편 정도 본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육두문자에 나도 깜짝 놀라고 지금도 이불킥을 하게 된 일이 최근에 있었는데. 그때는 참을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올라 뇌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튀어나온 상태였다. 그때와 지금은 달라진것이 없는데 왜 그때는 그런 언행을 했을까? 지금 이렇게나 부끄러운데.
오늘의 나는 누구지? 그때의 나는 누구였는가? 현실은 달라진 게 없는데 마음하나에 이렇게 삶을 대하는 두 눈이 달라진다고?
나는 그래서 생각한다. 내 머릿속, 마음 안에 계속해서 좋은 것을 넣어주어야 한다고. 나쁜 것들을 다시 빼낼 순 없다. 없애는 방법은 계속해서 좋은 것들을 넣어줌으로써 나쁜 것들이 저절로 바깥으로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