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고통스럽고 편치가 않은 이유를 찾기 위해 잠시 마음에의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뒤를 돈다. 뒤를 돌아 정방향을 따라야 할지 멈추어 바로 뒷걸음 해야 할지 고민하고 결정한다. 뒷걸음을 해야 할 경우 걸어온 길을 바로 볼 수 없으니 답을 찾는 시간은 두어 배쯤 더 걸릴 것 같으니 갈 길이 구만리 같다.
뒤로 돌아 정방향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면 걸어온 발자국을 따라갈지 좌우 여러 곳을 돌아보며 기억을 되살리며 감각으로 기억해 낼지 생각해 본다. 한 우물만 파듯 별다른 잡념 없이 걸어온 길이었다면 고통의 시발점이 어디였는지 제법 빠르게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샛길이 많아 이리저리 가려 고민했던 수많은 흔적들, 감정놀음 때문인지 심신의 단련이 부족했던 것인지 쉬는 시간마저도 끊임없이 잡념 가득했던 길을 걸어왔다면 다시 그 길을 되돌아 가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마음의 준비부터 단단히 해야 한다.
보통 시작부터 포기하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 걸어온 길을 외면하거나 삭제하고 마침내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 선택은 나만이 한다.
원인과 근본의 언저리에나마 다다르겠노라 다짐 한이상, 최종 목적지에서 맞닥뜨린 나의 장애와 마구니들은 칼같이 처단하고 지우며,다만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 그리고 새 길을 닦으려 길을 정비하는 게 고통을 이겨내겠다는 자의 기본자세다.
'똑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행동하겠다'는 다짐과 같은 말일 것이다.
그렇다. 나의 생각이다. 뇌를 해체한 듯 생각의 경로를 따라 적어가고 있다. 왜 나는 글을 쓸 때만 제정신이 돌아오는 걸까? 알면서도 못하는 사람이라니. 감정에 잠식당해 살고 있거나 일부러 회피하거나 둘 중 하나라 생각하며 또 스스로 자책한다. 그나마 글 쓸 때라도 제정신이 돌아오니 다행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더 엉덩이 붙이고 어디에서든 생각을 온전한 언어로 기록하겠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근본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정체가 많이 발생한 구간은 크고 작게 곳곳에서 발생했던 사고들의 후유증을 대면하는 순간이다. 후유증에 매몰되어 내가 얼마나 많은 증상들이 생겼고 그로 인해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며 결론의 원인을 단순화시킨다. 그리고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애초 갔어야 할 길의 5%도 채 가지 못한 지점에서 돌아온다. 후유증이 너무 아프고 후유증의 후유증을 재생산중이라 통증도 온다. 심신전체가 괴로워진다.
곧 완전히 경로를 이탈한 채 '힘듦'을 증명하는 삶으로 변질된다. 자동화 네비게이션은 아니어도 90년대 가장이자 차주인 아빠들의 필수품이던 '국도 안내 책자'만큼이나 길을 이해하려는 자기 노력을 요하는 수준의 지도가 필요했는데 이제 이 지도는 무의미 해진다. '나란 사람이 이렇게 억울했고, 의지와 상관없이 당하기만 했고, 그래서 이렇게나 힘들었으며, 그 후유증 때문에 일상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런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은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자신도 모르게 생성된다.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런 부류를 증오하게 된다. 그리고 곧 나쁜 사람이라 낙인찍는다.
이제 맨 처음에의 근본원인을 찾겠다는 포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시간이 흘러 '아차!' 싶지만 길은 완전히 꼬였으며, 원래의 목적은 다른 세상이 되었다. 내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지구본으로 한 뼘 정도 거리에 있는 태평양 건너 아메리카 대륙쯤 되려나. 이제야 다시 지도를 찾아보지만 그 지도는 지역명도 보이지 않고 구간과 구간을 나누는 경계선마저 희미해진 무용지물이 되었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내가 서있었으며 지도를 왜 보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의미 없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그것을 준비성이라 생각하는 오만함은 마음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그 세월이 길면 길어질수록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어진다. 나를 갉아먹게 된다. 인생에서 내가 얼마만큼 힘들었는지는 증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사실로 증명된다. 그런 류의 나를 갉아먹는 증명이 내게 유일하게 내어주는 건 삶에 대한 '애증'밖에 없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하루라도 빨리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 서있던 그 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