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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물안궁의 삶 Aug 25. 2024

일상에의 힘이 되는 일들

기도하는 마음

만약 모태신앙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종교를 신앙하며 살았을까? 어쩌면 어떤 종교에 의지하지 않은 채 혈혈단신 나의 선택과 결정을 믿음 삼아 살았을까?

아니면 유약한 마음으로 살던 청소년기친구 따라 가입한 고등학교 동아리 선교합창단 단장으로서 활동했었으니 자연스레 교회를 다니고 있지 않았을까?


실제의 나는 어린 시절 엄마의 종교생활을 보고 듣고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모태신앙으로 자리 잡아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이후 스스로 어린이 법회, 청소년 법회, 청년법회 활동을 선택해 이어왔다. 현재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채로 불교  교리나 가르침 자체를 믿고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비교적 오랜 시간 불교계 일선에서 활동해 왔지만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부처님의 말씀만이 무조건 옳고 우선시 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이웃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 때문에 절대적, 상대적 의미 어떤 것을 갖다 붙인다 한들 무의미하다. 다만, 분명한 건 성인이 되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렸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비과학적이다, 강요하는 종교라는 생각 역시 해본 적 없다. 그렇기에 여태껏 두렵거나 아프고 힘들 때 경전부터 꺼내게 된다거나 상황과 이유에 따라 약사보살을 읊조린다던지 관세음보살을 외울 수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비슷한 예로 간혹 종교에의 신앙이 깊고 두터워지면 무의식 속에서도 영향을 받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꿈속에서 누군가 나를 좇는 두려움 가득한 상황일 때 꿈속에의 나는 관세음보살을 염호 하면서 두려움을 물리치고 난 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거나 하는 식이다. 조금 더 나아간 이야기지만 종교와 일상의 정확한 구분이 필요하기도 하고 오히려 적절히 융화해야 하는 때가 있다. 종교에의 지독한 몰입으로 일상과 삶이 망가져서도 안되며 , 반대로 현실에의 나의 가치관 언행은 엉망이면서도 종교활동을 할 때에만 가장 깨끗한 척, 모든 것을 다 깨달은 듯 착각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욕심과 탐욕 가득한 삶을 살며 자기합리화하는 삶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만큼 종교와 일상, 일상과 삶 중간에서 자신의 적절한 위치선정이 중요하다. 조율이라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필요할 때만 종교를 찾는 것 역시 자의적 해석이 될 우려가 있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인생에 힘든 시기가 찾아왔을 땐 그저 '이것만 해결된다면 제가 무엇이든 다하겠습니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이른바 조건부 기도를 하게 되기 쉽다는 의미다.


종교활동은 무언가를 염원하고 바라게 되는 것도 있지만 '~~ 하게 해 주세요!'보다는 '내가 바라는 일에 대해 내 삶 속에서도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노력을 지켜봐 주세요!'정도의 마음가짐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도 바라는 게 많아지면 실망이 당연히 따르게 된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신이든, 유형무형의 지도자인들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들 안 그랬을까 싶지만 살면서 고민, 두려움, 불안함, 걱정들이 여러 날 지속되는 때가 많다. 특히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고 책임져야 할 사안들이 많아지면 더욱 그렇다. 우선 내가 먼저 변화해야 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을 때가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지만 어떤 것부터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을 때도 있다. 책을 통해서도 영상매체를 통해서도 '~이럴 땐 이렇게 하세요! ~~ 하지 않는 방법' 등을 소재로 한 속성 팁들이 많이 있지만 저마다 다른 자아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일률적으로  동시적용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고민해결을 위한 방법, 방법을 적용할 시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통찰력, 그렇게 떠오른 스스로의 결정을 믿고 실행할 수 있는 의지, 인내심을 비롯한 수많은 노력이 적절한 양, 때에 맞물려  오랜 시간  나의 것으로 체득한 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어 온전히 삶이 되었을 때 변화가 찾아온다. 그러한 변화를 위한 나의 몸과 마음을 다지는 방법 중 한 가지가 종교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내 삶을 바꿔준다는 표현은 그렇게 변화하기까지 종교활동을 통해 나의 습관과 마음가짐이 긍정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내가 바라는 대로 온전한 결과를 뚝딱하고 가져다주는 것이 종교는 아니다. 이것만 잊지 않는다면 종교와 일상의 조화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불교에는 오계나 보살계 등 불자가 지켜야 할 계명이 있다. 그 의미를 아주 쉽게 해석하면  하루 한 번 선한 행동 하기 즉 보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 보시는 꼭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여건이 어려운 누구나 보시를 행할 수 있도록 '무재칠시'라 하여 사람들을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하기 등 7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아주 소소한 것이라도 좋다. 나의 변화를 위한 노력이라는 건 거창한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이 쌓여 마침내 스스로 인식 가능한 결과물로 이어진다면 그것이 나만의 기도이자 신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내게 맞는 방법을 찾은 것이니 그게 믿음이자 신앙 아니겠는가?





돌이켜보니  역시 여러 날 동안 스스로를 믿어주는 일조차 쉽지 않았던 날이 있었다. 물론 가끔은 현재진행형인 날도 있다. 스스로 철이 들었다 싶은 날 이후에는 정말이지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은데,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왜 여전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 몸도 마음도 그때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 생각이 드는 날도 많은 것인지 회의가 들기도 했고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 날이 많았다.


특히 일상에서의 불안증이 삶의 숨통을 완전히 쥐어버린 듯한 감정을 느낌으로 수년을 방황하고 헤매는 날 속에 살았다. 그리고 그것이 오롯이 내 자식들에게 전가되지 않을지 늘 전전긍긍하면서도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그때 다시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기도하는 습관이었다.


  이전에는 마음의 문제가 생긴 원인도 알고 해결방법도 알지만 그것이 나아가 맞는 방법인지, 사실은 정말 그게 원인이자 해결방법이 맞는 것인지 계속된 의구심으로 보낸 날들 역시 수없는 날들 속에서 나는 초발심을 떠올렸다. '이거 예전에도 해봤는데 안돼. 이 방법은 아닌 거야' 싶은 의심 속에서도 한 번 더 기도를 통한 마음에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특히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외국인 포교활동에 매진하셨던 숭산스님이 남긴 말씀 중 가장 기억이 남는 구절이다.


'오직 할 뿐'


우선 한 번 해보는 것이다. 하다가도 잡념이 들고 무너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영 변화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나는 날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오직 할 뿐'이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에의 변화가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여러 장면에 투영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매일 아침 기도를 하고, 아침에 하지 못했다면 잠들기 전 밤에라도 해내는 스스로와의 약속.

무언가를 해내기 위한 체력이 약하니까 체력을 키우기 위해 매일 밤 달리기를 하기로 한 스스로와의 약속.


그렇게 '오직' 하면서 , 해내면서 한걸음한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이란 건 나를 믿어주고 나와의 약속을 지켜내는 일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고 오직 해내는 마음, 그런 가르침을 배운 종교생활을 존중하며 다시 그 종교에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는 일. 삶의 선순환이라는 생각을 해보며 오늘 남은 하루도 새 마음, 새 뜻으로 실천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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