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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물안궁의 삶 Aug 30. 2024

자기 마음을 못 지키면 받는 벌

"보살만의 마음의 정원을 잘 가꿔봐. 그게 인생의 다야.
있잖아.. 가족도 자식도 다 좋아. 좋은데 결국 내 인생 가장 끝에 남는 건
보살, 오롯이 자네 하나야."

                                                                            -불림 합장-





황무지 같은 마음밭에 목적지도 경로도 없이 방황한다. 하루에 십 수 번쯤  극락과 아수라 어딘가를 헤매고 있던 날들. 펄쩍 뛰는 마음 때문에 누워있다가도 비틀기를 여러 번, 화풀이하듯 숨을 내뱉으며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난다. 정말 이러다 사람하나 말라 비틀어지는 것 아닐까 싶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다.


슬프고 화나고 방황하다 후회하고 그런 나를 경멸하고 비하하고 연민하다 다시 힘을 내려하고.

곧이어 변하지 않는 현실과 굳어진 습(習)에 고꾸라지고 패배하고 마는 쳇바퀴 같은 마음줄.



새 마음 새 뜻을 이어나간다는 것. 그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예전에 아빠가 엄마한테 했던 약속이 있다. 결혼 전부터 빚을 수억 쯤 지고 나서 그것을 가족에게 들켜졌을 때, 빚의 목적이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비밀' 때문인 것까지 오롯이 까발려졌을 때. 집안내 전쟁과 폭풍의 끄트머리 즈음 화낼 힘도 없어 포기상태에 이른 엄마에게 가까스로 용서 아닌 용서를 구한 아빠는 약속했다.


"나 새 사람 될게."  그리고 언니와 나를 보며 말한다. "얘들아, 아빠 다시 태어났다. 완전히 새 마음으로 살 거다."


그리고 명을 다하기 전까지 처음에 까발려진 빚 말고도 숨겨진 빚들이 더 많았음을 아빠의 사망신고 전 수많은 금융정보들을 정리하며 추가로 알게 되었다. 그때 확실히 배웠다. 함부로 새로 태어난다느니 새 사람 될 거라는 약속 같은 절대 하는 거 아니라고. 나는 누군가의 변화를 지지하지만 사람 안 변한다는 말을 좀 더 믿는 편이 된 이유다.




가볍지 않은 뜨거운 무언가가 이리저리 벽에 부딪치고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며 미쳐 날뛰는 것 같은 느낌, 날뜀의 여파로 마음 모서리는 찌그러지고 벽은 긁힌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그 기저에 무엇으로도 꺼뜨릴 수 없는 용암이 흐르는 것 같은 뜨거움이 치미는 이 상태의 이름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젋은 날의  방황이자 성장통이라 애써 포장해 줄 수 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그 이름이 울화인가 싶다.  마음을 못 지키면 받게 되는 벌인걸까?


주인이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해 받는 벌은 황폐한 땅, 그 위에 시들어 말라 비틀어진 생물, 볼품 없어진 전경..  


- 내 집의 주인이 되라 했더니 남의 집 문 앞에서 그 집주인이 던져주는 관심만 기다린 죄
- 집도 가구도 벽지도 바닥재도 무료로 주었고, 헤지고 낡으면 보수하는 방법까지 알려줬지만 모든 게 완전히 찢어지고 낡아 고칠 수도 없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 집 앞 정원을 따스한 태양과 물과 비옥한 흙으로 가꾸면 나비도 잠자리도 알아서 찾아올 거라 힌트를 줬지만 잡초만 무성하도록 방치하고선 외롭다고 한 죄
.
.
.


죗값은 생각보다 더 깊고 참담했다. 정해진 형량을 받고 기한이 끝나면 복권되는 것의 성격이 아니다. 아니, 사실은 다시 갱생해서 살아보라며 복권될 수 있을텐데 이미 '끝난 사람'이라며 스스로 옭죄이게 만들며 두려움과 공포가 모든것을 덮어버린다. 앞을 꿈꿀수도 없게 만드는 암흑같은 무언가.


 사회에서 나 자신이 돋보이진 않아도 수천만명중 동등한 사람이라는 걸 최소한 보장해 주던 지지대가 사라진다. 어디가 잘못된 건지 한눈에 알 수도 없게 된다. 하지만 계속해서 망가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쉽사리 찾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아 괴롭기만 할 뿐이다.  그 기간에라도 '나'란 사람의 '마음'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집중하고 돌이켜봐야 한다. 그 끄나풀마저 놓치면 남 탓을 하게되고 내 탓은 없다고 여기게 된다. 거기서 화는 시작된다. 끝끝내 자성은 없다. 결국 남을향한 화가 쌓이고 쌓여 울화가 된다.


두번째 형벌은 대화가 안 된다. 서로 소통하는 말의 왕래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내 울화 안에 발작버튼이 되는 무언가가 건드려지면 주절주절 끝없이 이야기한다. 숨도 쉬지 않는다. 내가 무얼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AI처럼 머릿속 입력값만 줄줄 끊임없이 내뱉는다. 나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미세근육으로 느끼고 언어의 톤으로 느끼는 , 그러니까 스스로 현재에 집중하고 깨어있어야만 가능한 고급기술(?)은 원천불가하다. 그냥 내던져진 김에 정신도 마음도 내던져지는 삶이게 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이의 감정을 살피고 배려해 줄 여유는 언감생심 꿈같은 이야기다.


그렇다. 어제는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오늘의 이 사람은 누구였는가? 싶은 나의 얘기다.


자신의 마음줄을 놓치고 사는 사람의  모습일테다. 마음대로 뚫어놓은 길 속에 정처없이 헤매다가 잠시 멈춰서 있는곳이 어디냐에 따라 내 입도,마음도,모든것이 끄달려다니게 된다. 내가 없게 되는 것. 마음을 빼앗기면 나를 빼앗기는 것이다.


런 상태로 더 살아갈 것인지, 더 노력을 해 나갈 것인지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싶은 순간의 나도 다시 마음줄 탄력있게 잡으면 금방 초점이 맞춰진다. '나의,가족의,주변의,회사의,사회의' 나에 대해. 그래서 깨닫는다. 글을쓰며 생각이 든다.


스물 여덟해 되던 날 ,  딱 일년 서울 도심사찰에서 근무했었다. 다시 돌이켜봐도 치유의 시간이었던 날들.

도심사찰이지만 빌딩숲이 아닌 산에 둘러쌓인 한적한 곳. 그 곳의 분위기만큼이나 조용하고 낭낭한 마음결의 스님들이 사셨던곳. 사찰 바로 옆 건물 행자선원에서 외국인 행자 스님들의 마음수행을 돕던 비구니 스님이 어느날  내게 일러주셨다.


'보살, 여기와서 행복해? 스님은 참 좋아. 어디에 있든 행복할 수 있어. 그러니까 보살도 돈으로 비할 수 없는  태어날 때부터 내 것이었던 나만의 마음정원을 잘 지켜.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보살밖에 없어. '


나는 잊고 있었다. 황폐해진 땅의 시작도 보이지 않을만큼 저 깊은 지하에서부터 움트고 있던 생명의 근원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시작이있었기에 끝도 있고. 그 끝은 다시 시작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니까 포기 하지말자고. 다만, 그것은 눈과 마음앞에 어둡게 가려진 무명(無明)을 거둬야만 보이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온전히 내게 집중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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