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날 곧잘 꿈을 꾸는 밤이 많았다. 예지몽이나 선몽격의 꿈을 꾸거나 심리상태가 그대로 반영된 한 편의 파노라마처를 보여주기도 했고 때론 해몽서적 페이지를 수없이 넘겨도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조차 없는 꿈을 꾸기도 했다. 꿈을 자주 꾸는 현상이 결코 깊은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는 의미임을 알게 될 때 즈음 그런 날들이 계속해서 지속되자 잠들기 전 두려운 마음마저 들기도 했다.
어떤 날엔가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쭈뼛 서있는 상태로 근육통이 오기도 하고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만큼 감정선을 탄 나머지 하루종일 울다 지쳐 잠든 이의 마음처럼 울적함으로 오전 내내 보내야만 했던 날들도 많았다.
꿈에서 말하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거라 어느 정도 믿는 나로서는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게 참 중요했다. 내 조만간 해몽전문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도 하면서 여전히 해몽백과 페이지를 이리저리 횡단하고 포털사이트를 수없이 검색하기를 수년차.
이런 나의 꿈은 보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안부를 전해주기도 했고 내가 힘든 상황에 처해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고 청할 때마다 나타나 너를 많이 응원하고 있노라고 , 내가 도와줄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했다.
2012년 3월 마지막 주 일요일, 아빠는 내가 보는 앞에서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안색이 거의 짙은 초록색이 되었다가 온몸의 온기가 식어가는 모습을 집에서 쓰러지신 이후로 응급실에서 20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하던 그 순간까지 유일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를 치루고 곧바로 일상으로 복귀한 나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하루하루 살아갔다. 그렇게도 두 달 여가 더 지나서야 퇴근하는 버스에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주체할 수 없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그럼에도 나는 엄마를 챙기며 가장이 된 채 전보다 더 단단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생전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이 악물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아빠에게어떠한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 채 그리도 서로를 힘들게 한다며 싸우던 배우자를 보내게 된 거니까. 헤어지고 누군가가 하늘에 가면 좋은 기억밖에 남기지 않을 거면서 왜 속세에서 이 세상에서 그렇게 매일을 싸웠던 건지. 하지만 이미 아빠는 세상에 없고 엄마는 마음껏 후회할 시기조차 놓쳤다.
엄마는 자신이 아빠에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영가법문을 택했다. 쉽게 말해 우리가 큰 스님들께 좋은 법문을 들으며 마음을 닦듯, 영가를 위한 법문을 들려주시며 좋은 곳에 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맑고 깨끗한 법문, 말들을 전하는 의식이다. 당시 종단에서 율사로 계신 원로 큰 스님께서 아빠의 49재 막재 당시 영가법문을 들려주셨다. 연세 드신 원로 스님은 한참을 아빠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시며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많은 말씀들을 해주셨다. 나도 그런 스님과 아빠의 사진을 눈에 담으며 부디 아빠가 좋은 곳에 잘 당도하여 가족들 생각 말고 편히 쉬기를 바라며 법당에 앉아 계속해서 되뇌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두 달 여가 지났음에도 한동안 엄마와 나 둘이 사는 집은 참 삭막했다. 어떤 말도 조심스러워 쉽게 꺼낼 수가 없어 적막만이 흘렀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먹을 힘도 외출할 힘도 없었던 엄마는 오로지 경전과 108 염주를 굴리며 절을 하거나 염불 하는 일에만 매진해 잠에서 깨어 다시 잠이 들 때까지 기도만 하며 하루하루 보냈다. 그러다 몇 시간쯤 지나면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거실까지 들리는 날도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던건 울음소리가 들리는 엄마의 방문을 살짝 닫아주는 일밖엔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부둥켜안고 울 수 있을 만큼 용기 있는 딸이 되지 못했다.
마음의 슬픔은 아직 그대로지만 그나마 굵은 눈물 방울만큼은 겨우 참아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 우리는 아빠가 돌아가신 뒤 처음 맞는 백중기간중 아빠를 위한 천도재를 지냈다. 천도재는 사찰에서 두 시간 정도 진행되는 영가천도를 위한 의식이다.
유언도 남기지 못하시고 배우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한 채 갑자기 떠난 아빠는 왠지 세상에 미련이 많으실 것만 같았다. 그런 추측들을 잠시 뒤로한 채 나는 법당 내 영단을 바라보며 집전하고 계신 스님의 집전소리에 맞춰 광명진언을 계속해서 힘차게 외웠다.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 타야훔.'
스님의 목탁소리에 맞춰 혹여라도 아빠가 아직 이곳을, 우리 가족 곁을 떠돌고 계시다면 그 슬픔 거두시고 어서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바라며 두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힘을 냈다.
이제 남아있는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는 끝이 났다. 부디 그곳에서라도 행복하시길. 미움도 원망도 슬픔도 우리 서로의 사이에선 이제 지우고 감사함만 남긴 채 기억저편으로 보낼 수 있기를.
30여 년간 인연을 맺으며 힘이 들 땐 언제든 가서 기도 올릴 수 있었던 사찰이 내게도 있다. 절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니까 그 곳에서 나처럼 힘을 받고 용기를 얻는 사람이 수천 명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서울시 강북구에 있는 사찰,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명소이자 전통사찰이다. 그곳의 일주문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사천왕문이 나온다. 사천왕문을 지나 또 60m쯤 걸어올라 가면 지장보살상이 나온다.
어린 날 그곳을 지날 때는 "왜 부처님이 새까만거지?" 라고 생각하며 지나갔던 곳인데, 어른이 되어서 보니 그곳은 지장보살상이었다.
지장보살님은 무명에 쌓인 모든 중생을 구제할 때까지 성불을 미루겠다고 하신 이른바 대인배중의 대인배다. 대인배 지장보살님이 우리 아빠도 꼭 구제해 주시기를. 그래서 그곳에서나마 아빠가 꼭 성불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어쨌든 아빠의 천도재를 마치고 이주정도가 흘렀고, 나는 마침내 우리 아빠가 아주 행복하게 어디론가 도착했음을 알았다. 내 꿈을 통해서. 꿈속에서 아빠는 그 사찰의 지장보살상 앞에서 위아래 하얀색 옷으로 환복한뒤 줄을 맞춰 지장보살상 아래 있는 물줄기를 따라 열맞춰 계속해서 걸어내려 가셨다. 그리고 그 걸어내려 가서 도착한 곳은 실제로 사찰 신도들이 버스를 타는 곳인데 내가 "아빠~ 아빠 안녕!!"하고 반갑게 인사하자 아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걷거나 뛰는 모습이 아니라, 꼭 무빙워크를 타있는 사람처럼 다리는 멈춘 채로 휘익 내 앞을 지나갔다.
아빠의 그 표정이 너무 맑고 환해서 더 이상 아빠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평온한 모습이었다. 너무 생생했고 선명했다.
"엄마, 이제 아빠 걱정 안 해도 돼. 아빠는 분명히 좋은 곳에 갔어."
그리고 십여 년이 흘러 나는 한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여겨 풀 죽어 있던 내게 아빠는 다시 한번 꿈속에 나타나 나를 도와주셨다. 이번에도 아빠는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꿈 속에서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아무리 떼내려해도 떼어지지 않던 오징어 빨판같은 징그럽고 무섭게 생긴 것들을 전부 다 떼어주셨고, 딱 하나만만 남겨두셨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난 뒤 나는 길게 이어오던 고민을 중단했다. 아빠가 내게 전하고 싶던 메시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내 몸에 붙은 것들을 말없이 와서 떼어주고 딱 한 개의 붙은 것만 남겨두었다는 것. 아마 아빠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네가 힘들 때 내가 이렇게 늘 도와줄게. 용기잃지 말거라. 하지만 단 하나의 것 만큼은 너 스스로 해결하며 더 강해지면 좋겠구나. 나는 널 응원한다. 더 이상 걱정하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