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님! 올 9월 10월쯤에 이동수있어. 뭐 부서를 옮길 수도 있고 회사를 옮길 수도 있는데... 이게 그냥 이동수가 아니고.. 너무 파괴적이다.. 그러니까 그만 두더라도 그냥 그만두는 게 아니고.. 완전히 다 빼앗기고 끝나.. 아휴.. 원래 삼재 때는 뭐든 살펴가야 되는 거야. 아무튼 좋지 않은 상황이니 신중하게 해 봐요.."
간사에서 주임으로 1년만에 승진했지만 150만 원 남짓 월급. 그 돈으로 엄마와 둘이 생활비로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사실상 처음부터 고정지출을 다 메우지도 못했던 월급이다. 적당히 모자라야 압박감을 느끼는데 언발에 오줌누기 마냥 터무니없이 모자라니 감각도 없다. 언젠가 TV 예능쇼에서 개그맨 이봉원 씨가 말했다. 자신이 사업실패로 진 빚이 50억 있으나 50억 100만 원 있으나 매한가지니 후배들 술 한잔 사는 걸로 구박하지 말라며 박미선 씨에게 목청 높이던 웃픈 에피소드 말이다. 무튼 나는 없는 돈으로 전화 점사를 예약한다. 나도 내 마음을, 갈길을 모르고 가족들도 나 몰라라 하는 처지에 단돈 5만 원으로 미래를 점쳐준다니 오히려 내 쪽에서 퍽 남는 장사 같기도 하다.
선거열기가 너무도 뜨겁다. 최근 20년간 유래 없던 경선이라는 경합 속에 두 중앙회장 후보는 한 달간 전국 지회를 돌며 선거운동을 했다. 각 캠프의 요직을 맡은 이들과 함께 각 지역을 돌며 지회장, 지회원들을 만나 지회의 현황을 살핀다. 사고지회는 없는지, 신규지회를 개설한 지구는 없는지 등등 두루 살핀다. 자신의 공약을 이행하기 좋을 지구 지회를 탐색하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여러날 선거운동기간이 계속될수록 캠프에 합류한 지역임원과 지지자들도합류해계속해서 판을 키우고 열을 올린다.이런식이라면 역대 최고 참석율의 대의원총회가 될 듯하다. 마치 모의라도 한 듯이 정족수를 겨우 넘는 인원만이 참석해 안건조차 겨우 다루며, 안건심의 결과가 나더라도 늘 뒷말을 달고 다녔던 예년의 총회가 아닐 듯하다.선관위에서도 투표용지도 예년보다 3배쯤 더 준비했다. 여러 경우의 수에 대비해서 말이다. 보통 단독으로 입후보해 당선여부를 박수로서 결정짓는 행위를 이번에도 반복했다간 대규모 집회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다.
물론 이건 어느 작은 특수집단의 이야기다. 나라살림을 하는 곳도 아니고 지자체도 아니며 스스로를 특수집단이라 부르는 이들이 모여있는 어느 집단.
이번 선거는 연임을 위한 박힌 돌의 자리유지하기, 굴러들어 온 돌이 되어 밀어내기의 경쟁이다. 아니 싸움이다. 이들은 선의의 경쟁을 할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이기면 끝나는 싸움을 하기 위해 모인 것처럼 행동한다.
결판의 날이 밝았다. 나는 중앙사무국 직원으로 총회장 프런트에서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임시대의원총회장에 입장하기 전 참석 대의원들의 지회 회비납부 여부 및 적격 자격여부를 확인한다. 사실 지회명과 지회장 이름만 매칭될 뿐 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 태반이다. 걔 중에는 급히 지회장을 뽑아 표를 늘이기 위해 결합된 이들도 많다. 한 지회의 감사, 대의원의장이라면서 지회원 평균연령이 40대는 되어 보이는데 지회장보다 높은 직급의 있다는 이들의 얼굴은 20대 초반의 얼굴로 보인다. 급조된 인물인 것 같지만 넘어간다.
"응~언니! 우리. 우리 이렇게 3명 왔어, 우리 지회 회비 10만 원 맞지?"
반말은 기본이고 자신을 당연히 알 거라는 전제하에 모든 대화를 시작한다.일단 나는 그들의 언니도 아니다. 오늘 처음 본 이들의 대화이자 중앙사무국 직원을 대하는 모습이라기엔 뭔가 께름칙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교육받았다. 사무국 상근자는 지회, 지구의 회비로 녹을 받는 봉사자다. 나는 급여를 받으니 극구 직원이란 말을 쓰지만 이들은 그렇기에 우리는 활동가라고 불리기를 바란다며.
하지만 활동가라고 하기엔 자유가 없고, 직원이라 하기엔 권위가 없다. 이곳의 중앙사무국 상근직원으로 일한 다는 건 그런 것이다.
"네, ㅇㅇ지회장님이시죠? 신분증 좀 보여주세요!"
몇명은 미리 숙지해 놓은 사진 속 인물이지만 실물과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이쯤 되면 거의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티 내선 안된다.
내앞에 있는이를 오늘 실제로는 처음보기도하고, 사진과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누군지 확신이 없지만사투리의 플로우나 억양, 옆에 함께 있는 사람, 그들끼리의 저 멀리서 하는 대화내용, 내 눈치를 총동원해 원래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노라 하는 마인드를 장착하고 친밀감 있게 응대한다. 자칫 지회장들의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중앙사무국 식구들은 그 순간부터 몇 년간 안주거리가 된다. 지회 및 지부, 지구 회원들은 중앙사무국에 늘 화가 나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2년마다 회장이 교체되는데 중앙사무국에 대한 불신과 울화는 그 전통을 잘도 이어간다.
그렇다. 나는 대학교 졸업도 못한 채 나름 칭송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이 특수집단에 입사했다. 그리고 1년 10개월여 흐른 뒤의 상황이 이렇다. 여기서 일하며 배운 건 눈치요, 경쟁이요, 싸움이다.
특수집단에 입사해 마치 드라마속에나 나올법한 작은 정치집단을 보고 산듯하다.어리숙한 나를 이용해 중앙사무국의 비밀을 알아내려 하는 이들도 있었다. 국정원도 아니고 비밀단체도 아닌데 뭘 그리 파헤칠게 많았을까?
하지만 나는 어리숙하지 않다. 눈치도 있고 규정도 알기에 선거기간 중 그런 자료를 요구하는 그들의 행위가 위법인걸 알지만 그런 행위를 접해도 내가 나서지 않는다. 상급자에게 보고한다. 정당한 보고, 보고에 의한 결론 및 조치에 따라 나는 다시 어느 한쪽 파벌의 속한 사람으로 몰리고 오해를 받는다.
대단히 어마어마한 일을 하는 곳인가 싶지만 아마 이 특수집단 이름을 대면 아는 사람은 전 국민의 0.0001% 정도 될까말까 싶은데 여기 있는 이들의 광기와 현회장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열망만큼은무엇으로도 비할 수 없다.
무튼 선거전부터 온갖 잡음 속에 박빙의 경선을 치렀다. 3시간쯤 경과했고
대의원총원 중 유자격 의원 256명 중 기권 8명, 기호 1번 118표, 기호 2번 130표. 기호 2번 당선으로 끝이 났다.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났다. 기호 1번은 현 회장, 기호 2번은 이른바 신흥세력이었다. 나는 현 회장 밑에서 일하고 있는 상근자이니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갔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당선여부가 아닐뿐더러 나는 유자격 대의원도 아니었고 선거에 일절 관여한 바가 없다. 그저 기호 1번에게 애 많이 쓰셨다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라도 전하고 싶을 뿐이었다. 기호 2번은 나와 별다른 인연이 있지는 않지만 기호 2번 주변에 있는 이들이 선거기간 중 했던 행위들 때문에 사무국내 식구들이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축하한다는 말조차 선뜻 나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내 개인 생각이다. 티를 낸 적도, 내서도 안 되는 일이다.
26대에서 27대 회장단, 집행부가 꾸려지면서 유일하게 대를 이을수 있는 이는 나 하나뿐이었다. 사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구색이라고 보면 된다.
화합을 표방하기 위해 지난 치열하고 말 많았던 경선을 뒤로하고 전 정권을 품어 안고간다는 기치하에 나를 집행부 및 사무국식구로 이어가게끔 했지만 누가 봐도 배다른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새로움, 도약을 꿈꾸며 파이팅 넘치는 구호를 외칠 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임시대의원총회에서 경선결과를 듣고 잠시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전정권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좋으나 싫으나 2년간 함께 살 부대끼며 살았고 집행부 내에서 함께 살면서 아는 고생들이 있는 것이고 선거운동을 하며 고생했던 모습들을 알기에 선거결과가 공표되자마자 인간적인 차원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린 것조차 파벌의 기준으로 나뉘는 식이었다.
그들 시대에 두루 쓰던 정치판 마인드를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십 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식이었다. 지긋지긋한 사고방식이다.그럼에도 경선이 끝나고 그야말로 파벌이 나뉘어 뒤풀이를 하기보다 서로 화합의 장을 만들기 위해 사무실 식구들은 중간에 회포 자리를 옮겨 당선자의 캠프사람들이 있는 축하자리에 합류했다.물론 휩쓸려 갔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때 식당 입구에서부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한 나이 든 중년의 남자가 말한다.
"얘 상근 계속 이어서 하겠대? 얘 확실한 애야?"
충남일대 땅을여러 평 소유하고 있다는 오 남매의 아빠로 불리는 한 회원, 그러니까 차기 회장 당선자의 물질적 지원자이자 차기집행부 이사 예정자가 말한다.
나의 짧은 눈물의 대가가 이렇게 크다. 나는 들었지만 못 들은 척한다.도대체 뭐가 확실애라는 거며 그렇게 눈엣가시처럼 보일 나를 왜 계속 상근을 이어서 하기를 바라는지 되묻고 싶다. 물론 구색이 필요했음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선거 후 이 바닥 어딘가에서 알코올에 절어 이 특수집단의 역사, 그들의 선거의 승리를 자축하는 이들과 함께 나의 2012년이 끝이 났다. 그리고 2013년이 밝았다.
모두가 새롭게 시작하는 와중에 나는 2012년도 정권, 그러니까 옛사람이 되어 새로운 이들과 함께 한다. 나보고 업무와 집행부의 가교역할을 하라는데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예감이 좋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