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물안궁의 삶 Sep 30. 2024

철저한 이방인 2

나를 중간관리자라 했다. 이상한 직급체계였다. 여느 회사와는 달랐다.


간사-주임-부장-팀장


간사라는 단어는 일제시대의 잔재지만 그들은 그대로 사용했다. 그곳은 명색이 일제강점기의 잔재청산을 표방하고 그런 류의 집회시위에 여러 번 참석하는 단체다.  주임은 간사에서 부장으로 승진시켜 주기 싫어서 만든 급조된 직책이다. 부장직함을 달고 외부미팅에 나가면 명함과 당사자를 한 번 더 번갈아보는 일이 많다. 부장치고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에서 인턴, 사원급 연령대가 부장인곳이다 이곳은. 그렇다고 참신 젊은 인재들로 채워진 곳은 더더욱 아니다. 신기한 조직이다. 자칭 특수집단이라 일컫는 이들은 뭔가 모를 광기가 있었다. 그 광기는 옳은 일에도 쓰였지만 옳은 일을 위해 가는 과정에의 잡음과 시끄러움은 늘 지켜보고 가만히 있던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잡음,불똥을 알아차릴 새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 과정이 전쟁같아서 말미의 옳음을 만끽하고 기념해줄 이들이 다 전사해 떨어져 나가는 일이 허다했다.


나에 대한 대우는 새로 입사한 간사들보다 못했지만 마음가짐과 성과는 중간 관리자만큼 내길 원했다.  전형적으로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곳이다.  성격도 능력도 임기응변도 새로 들어온 두 명의 동갑내기 간사들과 견주어 무엇하나 나은 게 없었다. 새로운 간사에게 없던 예의와 경우는 젊음과 패기로 포장되었고 상황에 맞지 않는 말들을 내뱉는 실례는 엉뚱함과 귀여움으로 재평가되었다. 그들과 시작부터 다른 걸 알았기에 철저히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나와 친분이 있고 여러 차례 술로 독대한 적도 있는 아홉 살 많은 상사는 전 임기 내 근무했던 이들에 대한 증오와 무시로 가득 차있었다. 내가 그에게 후배라 한들 그 증오하는 집행부에서 온, 전임 회장의 선거 패배에 눈물 흘린 전정권의 충신 그 이상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


도대체 이제 막 사회에 나온 흰 도화지 같은 나에게 그들은 왜 그랬을까 되뇌어 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다. 기대와 격려라고 했지만 표현하는 방법이 틀렸다. 기대와 격려가 아닌 방임이고 무책임이었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정말이지 모든 구간에서 저히 혼자였다.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는다고 욕을 먹었고, 나서면 나선다고 욕을 먹었다. 그것도 동갑내기 신임 간사들이 보는 앞에서 보란듯이 대표해서 굴욕을 겪었다. 

왜 너는 '네'라고 한번에 대답하는 일이 없냐고 했고, 어쩌다 입을 떼어 설명하려하면 넌 할말이 왜그리 많냐고했다. 매일 옥상, 화장실에 가서 울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12시 방향에 청와대와 인왕산이 보였다. 우측으로는 종로경찰서가 자리했다. 뒤편으로는 조계종총본찰 조계사가 있다. 11시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고궁박물관, 광화문이 위치해 있다. 수십년에서 수백년은 더된 오래된 건축물,상징물들이 있는 이렇게나 터 좋은 곳에서 나만 적응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 기운을 따라가지 못해 튕겨지는 가볍디 가벼운 티눈 같았다. 고귀한 영혼들잠들어 있는 곳이니 나 같은 잔챙이는 이런 곳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염없이 울었고 가끔은 뛰어내리고 싶단 생각도 했다.


 신참과 나이가 같은 중간관리자란 이리저리 조리돌림당하면서 욕먹기에 너무 좋은 직책이자 스펙이었다. 매일 처절한 굴욕을 겪었다. 억울했다. 나 역시 전임 집행부에서 배운 게 없었다.  핑계가 아니다. 처음 입사했을 당시 스물네 살을 갓 넘긴 내게 처음 경험하게 해 준 건 새로 판 내 결재인 도장을 가지고 지원금 취소 후 새 지원금 수령을 위한 '가라' 문서에 날인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 가라문서에서 나는 퇴사했다 재입사사한 중고 사원이었다. 그들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에게 어떤 이유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첫 도장을 사용하게 한 것이 가라문서에 날인하게 하는 그들의 선배놀음이란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두어 달이 지나자 장부를 기장하고 국고사업을 신청한 뒤 정산하게 하는 등 나를 깊게 신뢰하기보다 철저한 방임의 모습을 계속해서 취했다. 이 사업에대한 목적도 목표도 설명도 없었다. 오직 직원이아닌 외부 보고용으로만 작성할 뿐이었다. 적응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떤 구간에서든 업무의 시작도 과정도 결과도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모든 일상에의 문서에 결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회사생활이 처음인 나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알지 못했다. 왜 새로운 집행부 사람들이 그들을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그 판단을 할 수 있는 내겐 머리조차 없었다. 처음 나를 이곳에 상근 시키기 위해 전 임기의 인사조직위원회의 사람들이 내게 준 온갖 사탕발림과 젊은 인재라며 추켜세워준 술자리에서의 몇 번의 대우가 이 단체에서 내게 해 준 유일한 선의였다. 이곳에 있으면 나는 바보가 되고 정신적으로 후퇴하는 것 같았다. 어른들의 기에눌러 어떤말도 하지못하고, 일은 배우지 못한채 세월만 보내는 무능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해가 지나 그렇게 새 집행부를 맞이했지만 이번엔 외톨이가 되었다. 업무적으로나마 나아지길 바랐다. 그러나 새 집행부 사람들의 나를 보는 시선은 그랬다. 너 지난 2년간 업무 배웠지? 다 할 수 있지?라는 눈빛으로 보았다.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먹잇감이 되기 딱 좋았다. 내가 무언가를 실수할 때마다 전임집행부를 싸잡아 욕했고, 그렇다고 나도 함께 말을 섞으며 전임집행부를 함께 욕할 만큼 철면피는 되지못했다. 자존심 다버리고 제대로 알려달라 간청할 수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명분상 데리고 온 직원이었기에 가족도 아니었고 책임만 쥐어줄 뿐이었다.


아무매일을 고민을 고민해도  나는 계속해서 이방인으로 자라날 뿐이었다. 가장 서운했던 구간은 아홉 살 많은 상사, 바로 그사람이었다. 내가  인간적으로 너무 많이 믿고 있었다. 믿은 만큼 좌절감도 컸다.  내게 대단한 대우를 해주길 바란게 아니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새 집행부를 꾸려나갈 때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 선배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둘이 있을 때와 다 같이 있을 때와 너무도 달랐다. 내가 지금 그의 나이를 훌쩍 넘어 생각해 봐도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전체회식이 끝나면 그들은 나보고 집으로 가라 했고 자기들끼리 2차를 가곤 했다. 또 한번은 신임 간사들과 내가 동시에 자격증 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내 면전에서 "너는 떨어질 것 같고 얘네는 붙을 거야. 얘넨 공부머리가 있잖아.."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나는 그들의 따돌림이 거의 죽음에의 공포로 다가왔다. 일하면서도 퇴근해서도 아침에도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고 학벌도 뭣도 없는 내가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도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고 바보 같았다. 


특히나 왜 그 아홉살 많은 상사에게 서운함을 넘어서 어느순간 증오가 되었을까 나는 곱씹어 보기 시작했다.


2013년 의 일이었다.




이전 06화 철저한 이방인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