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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물안궁의 삶 Sep 19. 2024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


"이런 급살 맞을 년"

"개가 뜯어먹을 년"


차마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에 가까운 뜻을 담고 있을 것 같은 저 무시무시한 욕들을 외할머니에게서 곧잘 듣곤 했다. 내게 직접 하신 것은 아니지만 이모들을 다그치거나 제3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때 멀리서도 들리는 말이였다. 이제껏 살면서 욕의 의미를 하나하나 해석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을 뿐더러 굳이 그래야할 이유도 없기에 그저 욕인가 보다 하고 넘겼던 말들인데 이제와 다시 생각해 보니 세상 잔인하고 무서운 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이런 욕들의 어원, 의미 파악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버럭 화를 내고 언성을 높이며 세게 지르는 스타일이 아니다.  조곤조곤 내뱉고 표정변화가 거의 없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간혹 빈정거리는 것처럼 입을 쌜쭉 하셨던 표정이 떠오르긴 한다. 그래서인지 저렇게나 어마무시한 말을 하실 때도 표정변화나 고성 없이 읊조린다는 점에서 외할머니 역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마치 관용어처럼 썼던 말들이지 않나 싶다. 다만, 말이 진언이 된다는 속설을 생각해 보면 거의 저주에 가깝기도 하다. 그렇다고해서 외할머니가 정녕 저주를 뿜은 것은 아니겠으나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뼈에 사무치게 싫었으면 그렇게 말하셨을까 생각해 본다.






 외할머니는 25년전, 내가 열두 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내 기억 속엔 분명 뚜렷이 존재했던 분이지만 뜻깊은 대화를 거나 애틋했던 기억은 사실 없다.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신정, 구정, 생신 등 온갖 기념일만 되면 매번 외갓집에 이모, 이모부, 사촌들 할 것 없이 모였지만 외할머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보다 주로 부엌에서 계시고 잘 나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손주손녀들과 살갑게 대화하고 퍼주시는 스타일도 아니셨고 주로 생계를 같이하는 장손주에 대한 사랑만이 의무이신 듯했다. 분명 우리를 미워하시거나 멀리하신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틋한 기억하나 없다는 것이 다소 슬프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린시절의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들이 몇장면 존재한다.


할머니가 예순다섯 되시던 해 외할버지는 담석제거 수술을 받으셨다. 이미 일흔을 훌쩍 넘기셨기에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혹시 당신이 깨어나지 못하시거든 더 이상 줄 수 없을 거라며 손주들에게 용돈까지 주시는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말들을 하셨고 그 옆에서 할아버지 수술기간 내내 간병하셨던 외할머니는 그저 묵묵히 할아버지 곁을 지켰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1주일만에 퇴원하셨다.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용돈까지 주실만큼 사실은 삶에대한 의지가 강했고, 한평생 야채가게를 운영하며 부지런히 살아온 심신의 건강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인것 같았다. 할머니도 이제는 한숨 돌리며 안도하셨다.


"이냥반 이렇게 삼재 땜하네.. 다행이여 증말.."


 그리고 그해 봄,여름 내내 고생한 할머니를 위해 외삼촌이(사실상 외숙모가) 생애 첫 효도 선물로 준비한 건강검진에서 뇌종양 진단을 받으시고는  곧바로 수술대에 눕게 되셨다. 뇌종양에 비하면 담석제거는 가벼운 수술이라 여겨질정도로 침통했다. 정작 환자는 할머니였음에도 그 몸으로 할아버지를 간병했던 외할머니의 모진 팔자..

 평생 안하던 효도 왜 이제와서 하냐며 이모들은 외삼촌을 나무랐다. 진심은 아니었을테다. 하지만 안하던짓하면 큰일이 생긴다는 옛말 틀린게 없다며 이모들은 연신 눈물을 훔쳤다.


더 안타까운건 25년 전 그 시절만 해도 뇌종양 수술은 개두술밖에 방법이 없었다. 수술자체가 제법 큰 수술이었음에도 성공리에 마쳤고, 할머니는 그렇게 몇일을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일반병실로 옮겨 회복식까지 드셨다.  퇴원을 몇일 앞둔 희망으로 모두가 기뻐했으나, 불과 몇일만에 생긴 혈소판 이상으로 인한 합병증 진단을 받고 끝내 퇴원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었다. 참 황망하고 안타까운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실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않았다.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몸살이 오고, 두통이 심하게 오는 날에도  영등포구 신길동 대신시장 골목 어귀 영신약국에서 조제한 약들로 숱한세월 연명했다. '펜잘' 두 알은 할머니에겐 매일 챙겨 먹는 영양제 같은 것이었고 스트레스로 인한 만성 위궤양 같은 증상에도 생명수가 돼준 것이 액상 소화제 '속청'이었다. 사실 펜잘은 내성이 생기면 한 번에 두 알을 복용해도 아무 느낌이 없다. 그만큼 내 경험상 오래 먹으면 내성이생겨 더 많은 양을 먹어야 될만큼 강한 성분인 약을 할머니는 거의 수십 년간 드셨다. 마음편히 누워 있을수 있는 날도 거의 없었다. 흰띠를 머리에 둘러매고 끙끙 앓다가도 할아버지가 오시면 일어나야했고 식사를 차려야만 했다. 나이마흔다섯이 넘도록 철딱서니없는 아들은 숟가락 하나 놓고 거들줄 몰랐다.


할머니의 생활패턴은 늘 고되고 갑갑했다. 할머니의 컨디션과는 상관없이 할아버지가 그날의 야채가게 장사를 마치고 오는 길 질 좋고 신선한 각종 야채, 나물, 과일을 한 아름 갖고 오시면 외할머니는 그것을 손질하고 다듬어야만 했다. 진귀한 음식이라는 결과값을 도출하기 위해 중간손질 과정은 반드시 할머니의 몫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보는앞에서 그날 내에 해두어야 했다. 살림 40년차지만 여전히 깐깐하고 호랑이 같은 외할아버지의 직성이 풀릴 리 없다. 늘 할머니 옆에서 잔소리하기 일쑤다.


평생 백수로 살았던 외삼촌은 장남이란 이유로 어떤 상황에서든 1순위로 대접받았고, 외숙모는 그 시절 서울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학생들이 간다는 서울여상을 졸업해 조흥은행의 지점장을 노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조흥은행은 imf이후 신한은행과 합병했고 외숙모는 살림은 할머니에게 오롯이 맡기고 본인은 업무에 매진한 끝에 신한은행 지점장까지 달성한 뒤 명예퇴직했다. 그만큼 외숙모는 그 시대상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강하고 독한 여성이었다. 그런 외숙모를 외할아버지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 백수아들의 아비 됨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늘 돈으로 보상하는둥 추켜세워줄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를 챙길 틈같은건 없었다. 그 댓가로 외숙모는 집안일을 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모든 살림과 양육은 외할머니의 몫이었다.


그 시절 시대상이 그러했겠지만 외할머니는 정말이지 마음둘하나 없었다. 자식들이 아들하나 딸넷이지만 딸넷 모두가 시집가서 자기들 살기에 바빴고 그나마 하나남아 대를 이어 줄 외삼촌은 외숙모보다 못난 모습을 하고선 적반하장 할머니에게 윽박지르고 있는 모습들을 견뎌냈을 생각하니 한숨이 쉬어진다.


"내가 저 노무 새끼 잘못 키워가지고... 내가 지랄이지 지랄이여... 허구언날 집에서 놀고 자빠져서는...."


하면서도 당신의 운명인 듯 체념한 모습만을 취하셨다. 푸념들로 당신의 속을 달랬지만 급살 맞을, 개가 뜯어먹을.. 과같은 어마어마한 말들은 그럼에도 딸들의 차지였다. 정작 생신, 구정, 신정마다 할머니를 위한 6년 근 인삼, 소가죽 장갑, 금목걸이, 용돈은 딸의 지갑에서 나오는데도 말이다.


할머니는 합병증으로 인해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지시게된 첫날 당신을 죽음을 예감한듯 둘째 이모에게 유언하셨다고 한다.

"내가 혹시 죽거든 진오귀 굿을 꼭 해달라.."고..


그렇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우재가 끝난뒤 온 식구들은 다시 외갓집에 모였다. 그리고 어른들은 모두 경기도 어딘가에 있는 굿당으로 향했다.

영이 맑은 아이들이 있기엔 말그대로 조상혼령,귀신에 씌일수 있기에 위험한 굿이라 사촌언니오빠,동생들은 그곳에 갈수 없다고 했다. 우리들은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사촌 큰오빠의 보호하에 할머니네 남았다. 유독 그날만큼은 집안에서 시끌벅적하게 깔깔거리며 놀수없었다. 어린우리들이었지만 그날의 분위기를 우리들도 알았던것 같다.


그리고 이제와서 생각한다. 할머니는 왜 유언으로 당신의 소원을  말하지 않으시고 진오귀굿을 해달라고 하셨을까?죽은뒤 나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사후세계를 믿으셨던 걸까? 혹은 이번생에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하셨기에 하늘나라 좋은곳 어디론가  가고 싶으신 바람이셨을까?

아니면 무당의 입과 몸을빌려 당신이 그간 표현하지 못했던 하소연, 진심들을 온 식구들에게 하시고 싶은 마음이셨을까.. 언성조차 높일수 없던 할머니의 마음을 대신해 딸들에게 때로는 제 3자를 욕하고 싶을때마다 쓰던 어마무시한 말들로는 부족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이해가 가기도 한다.


할머니에게 무속신앙은 참 가깝고 죽음을 앞둔 마지막순간에 내뱉은 한마디셨을 만큼 깊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시절 조상들, 어른들  대부분이 그러하셨겠지만 부족하게 살아도 물한그릇 장독대 위에 떠두고 달밤에 달과 별을보며 두손모아 빌고빌며 치성드리던 그런 어른이셨을 것이다. 그런 할머니가 신과 소통한다는 무당의 입을 빌려 진짜 하시고 싶은 말,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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