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뉴스에는 연일 과천에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서게 되었다고 보도한다. 과천시 일대의 중앙동, 문원동, 별양동 할거 없이 집값이 매섭게 치솟을 거란 예측보도가 나오고 하루가 다르게 이곳의 평판과 입지가 달라지고 있다. 처음 우리 가족이 과천에 집을 얻었던 1988년, 주공아파트 15평은 1,950만원 정도였다. 6년 만에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게 되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서로 자축인사를 주고받는 주공아파트 주민들끼리의 웃음소리와 지역의 호재이자 대형이슈를 뒤로한 채, 우리 가족은 어디론가 이사를 준비 중이다. 부모의 표정을 보니 좋은 일로 이사 가는 건 아닌 것 같다. 집 분위기 자체도 그렇고 저 방까지 들리는 엄마의 통화내용도 심상치 않다.
"언니, 그 동네는 좀 괜찮아? 살만해? 이돈 갖고 어딜 가야 될지 막막하네.. 아무튼 저 인간(엄마가 아빠를 부르는 15가지 명칭 중 하나) 때문에.."
엄마는 큰 이모와 통화하며 전화통을 두 시간 넘게 붙잡고 있다.
"괜찮아. 여기 신동아아파트도 대단지라서 30개 동 넘게 있고 작은 평수도 있어. 알아보다 갈데없으면 이 동네로와.. 애들 학교도 보내야 되지 않아? 여기 근처에 국민학교 하나 더 생긴다더라.."
개천에서 용 났다. 1970년대 중반, 삼형제 중 장남과 차남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경북 상주 흙보다 돌이 더 많아 보이는 허름한 산기슭의 집을 뒤로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공부도 특출나게 잘했던 두 아들. 평균키가 160cm가 넘지 않는 이 집 남자들 사이에서 돌연변이처럼 혼자만 키가 178cm이 넘고 얼굴도 훤하게 잘생긴 차남은 특히 그 유명한 양반가문 안동권씨 36대손 큰 며느리의 자랑거리다. 그 자랑거리 아들로 인해 엄마의 며느리, 손녀는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쫓기듯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삿짐 탑차 2대에 일꾼아저씨와 우리 가족은 셋셋씩 비좁게 나뉘어 탔다. 1시간 20분정도를 달려 큰 이모가 먼저 살기 시작한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도착했다. 과천에서 살던 집보다 세대수도 훨씬 많고 사람들도 북적북적 많은 편이다. 막상 와보니 동네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왠지 금방 적응할 것 같다. 하지만 적응을 너무 자주 해야 해서 문제였다. 방학동에서 안방학동 도깨비시장 근처, 거기서 또 쌍문동, 쌍문동에서만 이사 2번. 아무튼 도봉구안에서 4년간 이사만 5번 했다. 이것도 권 씨 가문 둘째 아들이 가족에게 선사한 선물이라고 보면 된다.
은행원과의 결혼이면 인생이 활짝 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여자들의 꿈과 현실. IMF로 인해 은행에 정리해고 피바람이 불던 1997년 보다 훨씬 더 전, 그러니까 그 활짝 편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엄마는 점점 더 억척스러운 여자가 되어갔고, 종교와 신앙에 의지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엄마는 자신의 모친을 따라 처녀시절부터 곧잘 갔던 절이 있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종파의 절이였는데 사실상 제사, 기도, 연등수입과 같은 여느 절의 수입시스템(?)과는 달리 신도들 사주팔자 봐주고 받는 복전으로 연명하고 있는 개인 소유의 작은 절이었다. 그 집 강아지 이름이 '바둑이'였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아빠 덕분에(?) 갖고 있던 것의 대부분을 빚 갚는데 쓰느라 가진 게 하나도 없던 엄마는 불행히도? 다행히도? 그 개인사찰에 갖다 바칠 돈 역시 당연히 없었다. 아직 은행에서 대리로서 건재한 둘째 이모, 잘 나가는 은행원 남편을 둔 막내이모, 건축일을 하며 고정적이지 않지만 뭉텅이 돈을 일 년에 한 두번 정도 가져오는 남편을 둔 큰 이모, 영등포 신길동 모 시장에서 야채가게를 운영하며 하루매출이 현금다발로 몇다발은 되었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수수한 옷차림과 외모에 비해 그렇지 못한 두터운 금반지 3개가 상징이었던 외할머니와 이모들은 그곳에 천도재, 연등비, 기도비 외에도 이름 모를 조상을 위한 굿을 비롯해 온갖 명목으로 큰돈을 헌납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엄마는 주말마다 경기 청평에 있는 그 절이 집결지였던 이모들과 자주 모일 수 없었다. 자연스레 이모들과도 멀어져 갔다. 딱히 친구도 없고 아이들도 어리고 외롭고 마음 둘 곳 없던 엄마는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럭키슈퍼 옆 현수막에 눈길이 간다. '불교입문, 기초교리 교육 강좌'
코딱지만한 청평 절에선 들어본 적 없는 생경한 단어였기에, 기본교리가 스님들 법문 말하는 건지 경전을 말하는 건지 뭔지도 몰랐다.
엄마는 현수막에 적힌 번호를 잊지 않기 위해 중얼중얼 읊조리며 집으로 돌아와 바로 수화기를 든다.
"거기 등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번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교육을 시작합니다. 5시 전에 미리 오셔서 접수하시고 매주 토요일, 일요일마다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3개월 여가 흘렀고 엄마는 불교입문 기본교리반 1기 수료생이 된다. 고등학교 이후 처음 느껴보는 졸업식, 수료식의 기분이었다. 엄마는 그때 비로소 배우는 기쁨, 마음에의 안정, 환희 심이라는 걸 잠시나마 느껴봤다고 한다. 마음으로 직접 경험한 기적과 같은 일은 보통 남에게 계속 입소문을 내고 권유하고, 알려주기 마련이다.
엄마의 첫 번째 포교대상은 언니와 나였다. 물론 포교랄 것 없이 엄마가 절에 갈 때 우리를 데리고 갔으면 될 일이긴 했다. 이윽고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곧잘 절에 갔고, 그 영향인지 훗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언니는 우연한 계기로 그 절에 취업하게 되었다.
사실은 한석봉 선생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글씨를 아주 잘 썼고 이는 지난 학창시절 경필대회 상장들이 증명하는 언니였기에 부처님 오신 날 사월 초파일 축원카드에 신도들의 축원을 대신 써주는 아르바이트 겸 봉사하러 3일간 갔었는데 언니의 글씨를 본 노보살님들의 칭찬이 자자해 나름 그쪽 업계(?)에서 스카우트당한 것이었다. 절이나 어디든 역시 입소문은 힘이 세다.
간절한 발원이니 만큼 신도들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매일 정성을 다한다. 그게 기도가 되었든 공덕을 짓는 일이되었든 말이다. 그러다 보면 좀 더 신중하고 예민해지게 마련이다. 그 귀한 발원들을 젊은 아가씨가 정성껏 수기로 써주니 얼마나 기특해 보였을까? 보살님들은 아주 흡족해했고 그 이야기가 주지 스님귀에도 들어갔던 것이다.
마침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렇다 할 일자리도 없이 취업도 번번히 실패했던 언니는 긴 고민 없이 절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나서 언니가 근무하던 사찰 종무소에 선글라스를 쓴 중년이 남성이 들어온다. 포니테일 스타일로 희끗희끗한 머리를 길게 묶은 도사포스의 아저씨였는데 계속 언니옆에서 서성인다.
"제가 점도 좀보고 관상도 좀 볼 줄 아는데.. 봐줄까요?"
"...."
언니는 고개를 돌린다. 이상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언니는 그런 사람을 보면 보통 대꾸를 안 하고 피한다. 절밥 몇년이면 웃으면서 헛소리를 차단할 수있는 능력도 생기기 마련인데 스물셋 언니는 아직 그 경지까지는 못갔으니 고개돌리고 외면하는게 최선이다.
그나마 다행히도사찰엔 일하는 처사님, 보살님, 봉사 신도님등 보는 눈이많았고 일반 신도도 매우 많은 곳이라 그 포니테일 도사가 언니를 해치거나 위협을 가할일은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언니옆에 함께 일하는 젊은 보살님이 말한다.
"어? 저 볼래요 저 봐주세요!"
"아..나는 이 아기보살님 꺼 봐줘야 될 거 같은데.."
언니는 함께 일하는 언니와 그 도사포스의 아저씨의 성화에 고개를 다시 돌려 그 돌려 응시한다.
뭐 생년월일도 필요 없고 얼굴만 빤히 본다.
"부모님이 두 분 다 계세요?"
"네.."
"아버지가 살아계세요?"
"네..."
"그래요? 살아계시다고요?... 아빠자리가 없는 얼굴인데... 아마 그러면 아기보살 네 아버지가 2년 안에 크게 아프시거나......."
"아, 아닙니다.. 잘못 보셨어요..."
괜히 들었다 싶다. 뭔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나 싶다.
보통의 절도 그렇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대형사찰, 산사는 항상 24시간 개방되어 있다. 야외 기도터는 물론 전각의 문도 항시 열어두어 언제라도 신도들이 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 동네 인근의 노숙인들이 오면 무료로 공양도 내어주고, 그 누가 사찰에 오든지간에 강제적 퇴거는 어렵다.
하지만 언니는 저 포니테일 도사가 좀 나가줬으면 생각한다.
특히 그 절은 산중에서도 제법 높은 곳에 있어 산 아래부터 일주문이 있는 곳까지 관광버스 차량 5대를 계속해서 로테이션 운행한다. 특히 산 아래 신도 버스대기소 앞에는 이른바 마음이 아프신 분, 정신이 다소 온전치 못한 분들이 집결할 때가 많다.
이를테면
김동성보다 오노를 응원한다며 소리를 지르고,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림'을 부르는 배바지 입은 아저씨,
긴 생머리를 춘리처럼 양쪽으로 말아올리고는 루즈를 입술선 바깥까지 진하게 그린채, 사찰 셔틀버스에 앉아 하루종일 내리지않고 왕복하는 삐삐머리 아줌마,
쉬지않고 육두문자를 내뱉고 간혹 혼자만의 대화를 하는 노숙인 아줌마 등등... 유명인사 몇 분이 계시다.
그래도 그런 분들을 절에서 강제 퇴거조치 할 수 없다. 다른 신도들도 힐끗 쳐다보긴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절에 올때 만큼은 마음이 자유로워야 하며 배경, 환경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배척하거나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절이란 그런 곳이다. 특히 그 시절 사찰 문화가 더욱 그랬다. 스님네들을, 불교도를 이른바 '자비문중'이랑 일컬을 때였으니 그에 맞는 마음과 태도를 갖추어야 했다. 한 끗 차이로 달라 보이는 그들이 정말 주변에 있는 사람을 해하지 않는 이상 어떤 다른 방도를 쓸 수없고 쓰지 못했다. 조금만 더 양보하면 써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사찰의 일원으로 일하며 그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 포니테일 도사와의 대화가 끝난뒤 언니는 다시 또 생각한다.
"절에 누구든 올 수 있다고 하니까 정말 아무나 오는구나..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모이네 정말..날 언제 봤다고..자기가 뭔데 관상을 보고 아빠 이야기를 하고 난리야"
그렇게 찝찝한 관상평을 남긴 포니테일 도사의 말을 털어버리기 위해 언니는 오늘만큼은 퇴근길 사찰 셔틀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내려가기로 한다. 땀을 좀 내야할 것 같다. 걸어 내려가는 동안 다 잊어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