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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물안궁의 삶 Sep 08. 2024

알아도 못 막는 것, 차라리 모르는게 나은 것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나는 부모에게 한 끼 식사를 꼭 차리고 싶었다. 기껏해야 분식에 불과한 것들의 레시피를 익히기 위해 집에 있는 요리책 세 권을 꺼내 정독하고 머릿속에 익히기 위해 노력한다. 평이 채 안 되는 부엌에 덩치 큰 딸내미가 들어오는 것 자체가 걸리적거리는 짐이라 여긴 엄마 때문에 그간 하고 싶어도 해볼 수 없었던 부엌일을 이제 효녀짓 한번 하겠다는 이유로 당당하게 입성하려던 참이다. 한 끼 식사 차려 부모에게 대접하는 게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인 것 같았다. 부모에게는 그저 술 먹고 제때집에나 들어오기나 하면 제 몫은 하는 것이라 여길 만큼 기대치가 낮은 딸이니까. 부모에게  난 덩치에 비례해 듬직하기보다 우티우티한 손 많이 가는 무얼 맡겨도 신경 쓰이는 그런 존재였다.


밖에서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술로 이름 날리고 있던 나는 집에 있는 날에도 주로 술을 마시고 싶어 하거나 술이 덜 깨었거나 술약속을 잡고 있거나 셋 중 하나였다. 보통 온전히 제정신인 날이 없던 내가 부모에게 식사 한 끼 차리겠다고 준비하는 며칠 동안 매우 청정한 정신을 유지했다는 것은 나름 큰 결심이라고 볼만했다.


뭐 대단한 메뉴도 아니다. 기본 중에 기본이기에 손맛이 중요한 떡볶이, 유부초밥, 김밥이다. 꼭 부모에게 나란 존재처럼 은근 손이 많이 간다. 특히 김밥은 하나하나 재료손질하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좁디좁은 주방에서 빠르게 준비하려면 머릿속에 모든 세세한 순서를 다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일단 큰소리부터 치고 본다. 한 이틀 전부터 토요일 저녁은 내가 차리겠노라고 선포한다. 사실 뭐 늘 그랬지만 집분위기도 안 좋고 시집간 언니도 주말이라 온다 하니 이런 날 내가 차린 음식을 대접하면 다른 집처럼 하하호호 오순도순 이런 건  고사하고 싸움은 없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아빠는 며칠 전부터 몸이 좋지 않다. 감기 몸살이 있어 집에서 자주 누워있기를 반복했고 자꾸 갑갑하다며 물도마시고 몸이 이상하다며 피로회복제를 찾는다. 원래도 약국 표 약더미를 검은색 어깨끈 달린 가방 가득 들고 출퇴근하던 아빠였기에 늘 걱정했지만 그 걱정조차 오랜 세월 해와서인지 심각성을 느끼진 못한다. 많이 무뎌졌다는 뜻이다. 정확히 어디에 효과가 있는지 모를 약들의 성분을 인터넷에 검색이라도 한번 해봤으면 됐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할 만큼 우리 사이엔 거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분식 한번 차리는 게 크나큰 효도인가 싶을 정도의 딱 그 거리. 부모가 싸우지 않는다면 그래서 집안 분위기가 또 한 번 무너지는 일만 아니면 다행이니까.


아빠의 보통의 통증이나 몸안좋음은 보통  목욕탕 가서 온몸을 뜨거운 물에 지지고 난 뒤  수면실에서 두어 시간 자고 오면 풀리는 것들이었다. 거기에 맥반석 계란 몇알 사와서 집에서 까서 먹으면 그걸로 자가치료는 완료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보다 통증이 오래가는가 보다.  아빠가 키도크고 덩치가 있지만 건강하고 다부진 체력은 아닌걸 알고 있다. 다만 이마저도 오래 알던 일이라 여전히 난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도 누워있는 아빠가 마음에 쓰여 김밥재료를 손질하다 말고 집 앞 약국에 가 뜨뜻한 광쌍탕 한 병을 사 와 뚜껑을 따서 건넨다.


"아빠, 이거 마셔. 거의 다 돼 가니까 5시쯤 되면 같이 밥 먹어! 내가 차렸어 유부초밥이랑 어묵탕 하고 떡볶이."

 

이윽고 완성된 분식을 아빠 앞으로 한 상 차려낸다.  다 같이 먹기로 했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아빠에게만 작은 상에 따로 차려냈다. 아빠는 어묵탕 한입을 뜬다. 김밥도 꾸역꾸역 삼킨다.

" 잘 만들었네. 이런 걸 다하고 웬일이냐" 몇 숟갈 더 뜨고 아빠는  말한다.

 " 미안한데 나 이거 더 못 먹겠다." 하더니 어묵탕을 몇 숟갈 뜨고는 다시 눕는다. 어쩐지 아빠 몸이 심상치 않은가 보다.


마저 엄마와 언니를 위해 그릇에 덜었으나 엄마는 주로 내가 한 음식은 안 먹는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세척하지 않았을 야채, 꼼꼼함과 거리가 먼 술이나 마시고다니는 믿음 없는 딸이 해준 음식을 먹으면 자신의 몸에도 영향을 미쳐 속이 더부룩해 질거라 여기는 엄마는 뭐 맛도 안 본다. 나 역시 기대도 안 했다. 언니와 내가 남은 음식을 조금씩 나눠 먹는다. 조카는 어묵탕을 쫍쫍 소리내며 잘 먹는다. 그래도 조카카 내 체면을 살려주는가 싶다.

 

  해가지고 어두워지자 언니는 조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지만, 스물네 살 어린 딸이 혼전임신으로인해  일찍 시집가버린 게 아빠는 못내 가슴이 시리다. 자기 몸이 많이 안좋지딸과 조카를 집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언니랑 조카와 함께 집을 나선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를 택시 태워 보낸다. 1900원 기본료 거리에 기껏해야 신호한번 걸리면 300원 정도 추가로 나오는 거리인데 거기를 또 동행한다. 그래도 그게 아빠의 마음인가 보다. 그렇게 언니와 조카는 아빠의 호의와 호위를 받으며 집에 도착했다.





아빠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해진 집 거실에 앉아 아빠는 TV를 본다. 가슴이 자꾸 답답해서인지 연거푸 물을 마시며 해소하려 하는 듯하다. 몇 컵을 들이켜다 안 되겠는지 아빠는 페트병째로 마시다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레가 들린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TV를 응시한다. 사레는 곧 멈출테니까. 그런데 이상하다.  20초쯤 넘어간 것 같다. 30초가 넘어간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빠는 이미 얼굴이 초록빛으로 변해있다. 살려달라고 숨을 못 쉬겠다고 소리조차 오래 못 지르시고 그렇게 앞으로 고꾸라지신 채 돌아가셨다. 나에게 우울증이 심해 한 달 치 처방받은 약이 있는데 가슴이 답답해 아프다는 아빠에게  이거 마음이 아플 때 먹는 약인데 이거라도 먹어보겠냐며 울부짖으며 나는 말한다. 아빠가 대답할 수 없는 상태인걸 나는 안다. 그래도 계속 말을 건다.


나는 아빠의 고통과 절규에 가까운 소리와 죽음에 이르는 그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쳐다본 채로 그자리에서 무기력하게 아빠를 보냈다. 아빠가 그렇게 세상과 연이 끝나는 과정을 본 사람은 나 혼자였다.  엄마도 쿵하는 소리에 방에서 놀라 뛰어나온다. 그대로 앞으로 엎어져있는 아빠의 상체를, 얼굴을 나는 들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여전히 믿지 않는다. 이렇게 가실리가 없다. 이렇게 순식간에 삶이 끝날 리가 없다.

119에 전화를 걸었다. 환자가 살아있는지 가슴에 손을 대어 보라 한다. 하나 가슴에 손을 댈 수가 없다. 아빠가 엎어져있었기에. 그래서 등에 손을 대니 미세하게 무언가 쿵.. 쿵..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심폐소생술까진 할 필요 없고 지금 119가 이미 가고 있고 2분 안에 도착하니 그대로 기다리란다.


구급대원이 도착했고 아빠를 들것에 눕혔다. 이미 아빠의 피부색은 사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엄마, 아빠 살 색깔이 왜 이래? 왜 이러는 건데?..."

"그런 소리하지 마. 아빠 괜찮아질 거야."

나는 아빠를 따라 구급대원과 함께 응급차에 올라탔다. 한일병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안에서 만져본 아빠는 아직  온기가 조금 남아있다. 손끝은 식어가는 것 같긴 한데 아직 발이나 다리는  따뜻하다. 그런데 피부색이 자꾸만 왜 이러는 거지 혼자 읊조린다.


119 구급대원 아저씨는 지금 쓰러져 이송되고 있는 환자도 함께 가는 딸도 너무 젊다고 생각한다. 차마 끝까지 말을 이어내지 못한다.


"따님분... 지금 체온이 문제가 아니라.... 하.. 그...."

물론 나는 알아들었다. 그래도 믿지 않는다. 믿을 수 없기에 믿지 않는 것이니 이상할게 없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의료진 7명이 아빠에게 달려다. 정말로 선생님들 이야말로 곧 쓰러지셔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혼신의 힘을 하셨다. 25분간 심폐소생, 전기충격 하실 수 있는 모든 걸 다 한끝에 전기충격 소리도 이름을 알수없는 기계소리도 순간 정적으로 바뀐다.곧 연세가 지긋한 의사 한 분이  나를 부른다.


"아버지가 지병이 있으셨나요? 저.. 따님분, 아버님이 이미 돌아가신 상태로 이송된 건 아시죠? 워낙 나이도 젊으시고 하셔서 저희도 어떻게든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라 다른 검사를 더하지 않았고 엑스레이만 찍었는데 폐에 하얗게 무언가가 채워져 있습니다. 사인은 급성 심장마비입니다. "


사망선고를 받자마자 의사들의 손에 순식간에 아빠가 입고 있던 모든 옷, 속옷까지 순식간에 벗겨지고 몸을 들출수 없어 벗겨지지 않는 옷의 일부분은 가위로 잘라낸다. 그리고 흰 천으로 아빠를 덮고 바로 영안실로 옮겨진다. 나에게 아빠모습 조차 확인 시켜주지 않는다.  

바로 옆 병상에 어느 노부부께서 아빠를 향해 "아이고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하며 읊조린다. 내게 아빠를 붙잡고 울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두 다리로 지탱해 서 있을 힘조차 없다.  이 병원에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도 아빠를 보내줄 사람도 나 혼자밖에 없는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응급실에 그대로 서있는 내게 빠르게 옆칸 접수대 야간진료실 담당자가 다가와 장례절차를 안내한다. 물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 나는 빨리 엄마랑 언니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불과 1시간 30분 전 자신과 딸을 데려다주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 언니에게 나는 이 사실을 알릴 수 없다. 내가 아는 언니는 제정신에 못살거다. 자기탓이 아닌걸 알면서도 자기탓이라 할거다.


엄마에게 차마 남편의 사망소식을 알릴 수가 없다. 차라리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중환자실에 계시다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사망선고 받았음을. 도무지 난 자신이 없다.




그렇게 모든 게 끝이 났고 나는 아무것도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아빠는 떠났다.


그때의 난 스물여섯이었고, 아빠는 53세였다. 그 나이에 죽음을 준비하기에도 일렀고 준비할 수조차 없었다. 정신이 혼미한 말도 안 되는 순간에 나는 문득 파노라마처럼 기억이 스친다.


언니에게 몇 년 전 아빠 자리가 없다고 아빠가 살아계신거 맞냐고 되물었다던 이상한 아저씨와 엄마에게 아빠의 사고 치는 일들이 53세가 되면 모두 멈출 거라던 말들이 떠올랐다. 사고치는 일들이 멈추는게 아니라 아빠의 삶이 멈춤을 의미하는지 꿈에도 몰랐다. 공교롭게도 아빠도 언니도 쥐띠 삼재였고, 거기에 더해 언니는 스물아홉 살, 아홉수였던 해, 2012년이었다.


미래를 본다는  사람들이 한 말들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고 설사 알았던들 그걸 죽음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 알았어도 대비할 수 없었을 테고, 어쩌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몰랐던 게 다행일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건 나는 아빠에게 그 어떤 것도 해준 게 없다. 그저 술 먹고 제때 집에 들어오기만을 바랐을 아빠의 기대조차 깡그리 무시했던 딸로, 마지막 순간에 한 딸노릇이라곤 어묵탕에 떡볶이가 고작 전부인 그런 딸로 남았다.




여전히 나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그게 미래를 보는 누군가의 점사대로 일어난 일이었든 삼재 때문이었든 아홉수 때문이었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아빠의 죽음 이틀 전에 내가 한 일은 아빠에 대한 성토대회였다는 사실이 나를 더 미치게 만든다. 술이나 진탕 먹고 아빠에 대해 살면서 느낀 서운함을 토로했던 마지막 술자리가 아빠 돌아가시기 바로 이틀 전이었고 그곳은 대학로였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곳을 가지 않는다. 갈 수 없다. 그리고 그자리에 함께 있던 이들에게 그 이후 아빠에 대한 어떤 말도 더 하지 않는다. 내게 위로의 말을 건내고 장례식장에 와 함께 애도해주었지만 그 날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서로 꺼내지 않는다. 암묵적으로 굳이 안해도 될 이야기인걸 우리는 안다. 그리고 곧바로 나는 내게 환멸을 느낀다. 대학로에서의 성토들과 그 울분이 아빠의 죽음과 비할 것이 아니란 걸 안다.


핑계 대는 거지만 어쩌면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단 번이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더 해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깟 분식 따위가 아니라 더 근사한 밥상을 마지막으로 차려드리지 않았을까?  만일 내가 아빠가 그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더라면 내 아픔 풀 수 있는 곳이 없어 술에 미쳐 살던 딸년이었어도 그 숱한세월 단 몇 번이 되었든 30분이라도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뻔뻔하게 생각한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밥 한 끼 차려드리고 싶었던 내 엉뚱한 결심을 약속한 날에 지켜냈기에 아빠에게 딸이 차린 마지막 식사 한 끼 하실 수 있게 해 드린 것으로 수많은 죄책감 중 단 한 페이지라도 넘길 수 있다면. 이제 그렇게라도 나는 아빠를 보내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아빠를 애도하고 용서를 빌며 나의 모든 것들을 바르게 되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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