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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물안궁의 삶 Oct 24. 2024

다 잃었으니 이제 얻을 것이다

다 잃고 나니 알맹이가 보인다

아버지를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버림받았다. 아니 사기를 당한걸까.

그리고 직장을 잃었다.


3년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무엇하나 내 뜻이었던 것은 없었다. 내 어리석음이 이유일 것이다. 그저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닌 채로 살았던 날들에 대한 대가였다. 그래서 누구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믿음에 대한 갈망으로 나온 집착은 누군가에게 부담스럽거나 커다란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나오게 된 것 역시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했기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래서 내 탓이라 여기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 사람은 실장에서 사무총장으로 승진하며 계속된 나아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조금똑똑했더라면 내가 조금 더 영악했더라면 그 사람도 같은 벌을 받게 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나의 잘못만을 뉘우칠 줄 아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멍청했고 어리석었지만 순수했기에 나를 둘러싸던 주변 어른들은 울며 용서를 구하는 나를 내팽개치거나 외면하진 않았다. 온전히 외면하지 않음이 100평의 땅에서 99.9평이 지뢰밭이기에 이렇게 나는 죽는구나 생각하지만 단 0.1평의 실낱같은 확률로 까치발 들고서라도  그 길을 나설 수 있게 하는 숨통이었다.


한순간에 아버지를 잃고 곧이어 직장을 잃게 되며 가세는 갈수록 기울었고 나는 어디에도 숨 쉬고 호흡할 공간도 시간도 없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돈을 잃고 가족을 잃는다는 건 어쩌면 하늘이 내린 천벌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일상을 살아야 했지만 내 상태는 이제 막 전쟁이 끝나 모든 걸 다 잃은 상황에서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 직장 나왔어. 괜찮지? 어떻게든 일은 구할 테니 기다려봐."라고 엄마에게 에둘러 변명했다.. 직장에서 나오게 된 이유를 차마 엄마에게 말할 순 없었다.  사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해준 것 같기도 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한들 이미 정리된 일이고 다시 펼친다 한들 모녀 깜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무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애써 엄마의 입막음을 시키는 수밖에 없다. 급히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적인다.

대학교 중퇴, 무 자격증, 토익응시 이력조차 없음. 초중고 성적 중하. 전 직장에서의 경력 2년 2개월. 가진 재주 없음.  

내게 맞는 옵션을 걸면 걸수록 조회되는 검색결과 개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자존심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잊어버린 지 오래다. 애초 있지도 않았던 자신감은 내 처지에서 가능한 구인란 검색수만큼 팍팍 떨어지고 있었다.


'이런 나여도 살아보겠다고 하는 건데.. 이번달 안에는 어떻게든 구해봐야지.'

매일 검색해 보지만 딱히 달라지는 검색건수는 없다. 삼일째쯤 지났을 때 생각했다.


죽지 못하니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선택한 건 내 몸과 마음에 묻은 더러운 때를 벗겨내는 것이었다. 우선 휴대폰 전원을 껐다. 앞으로 10일간은 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단절인지 조절인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슬픔과 아픔을 핑계 삼아 제 정신인 날이 별로 없게 만들었던 참이슬 오리지널을 끊고자 했다. 술이 생각날 때마다 서울우유 1000ml를 냉장고에서 꺼내 한 컵 씩 가득 따라 마신다. 하루에 한팩은 기본이다.  신발을 신기도 전에 신발을 들다시피 해서 매일저녁 7시에 나간다.

구호는 '나는 달린다. 이것도 못 뛰면 진짜 죽어야 한다. 이제껏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쉴 새 없이 되뇌며 달렸다. 40분쯤 달리고 오면 집 앞에서 줄넘기를 1500번씩 했다. 그러면 1시간 1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 얼굴이 빨갛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집으로 들어온다. 그대로 찬물목욕을 하고 우유 한 컵을 다시 마신다.


그리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를 넷북으로 틀어두고 멍 때리며 본다. 어쩌면 제목도 악마인지. 처음엔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해석 전에 그냥 '악마'라는 단어에 끌려 보았는데 이영화가 다시 살아보겠다는 불씨를 되살려준 영화이기도 하다. 메릴 스트립의 눈돌림, 호흡법, 걷는 속도, 앤해서웨이의 대사 모두 외울 지경이다.


이런 노력 아닌 노력이 가상했는지 구인구직 사이트에 눈에 띄는 검색건수가 하나 생겼다.  '서울시 강북구 소재 사찰 재무회계 담당 종무원 채용공고' 학력 무관, 경력무관.


어쩌면 기도하며 일을 하며 마음을 쉬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의 묵은 때를 벗기고 새로 시작할 기회가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입사지원을 했고. 곧 내게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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