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견디면 깨달음과 트라우마 어딘가의 것을 남긴다
깨달음일지 트라우마일지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러다 일순간 부숴지겠다 싶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하늘은 분명히 버틸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준다. 그럼에도 다시 겪으라 하면 억만금을 줘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시절이다. 삼년간 세 가지 재앙을 모두 겪은 세월이었다. 그것이 삼재였는지 무엇 때문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저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세월이었다. 한 해를 돌아볼 이유도 새해를 기다릴 이유도 없던 날들이었다. 조금 더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팔난을 모두 겪고 짊어지기엔 아직은 너무 젊고 순수했기에. 분명히 멍청했고 어리석었지만 그저 못돼 쳐 먹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마지막 면죄부를 준 것만 같았다. 불도저로 자비 없이 밀어버리는 것처럼 나를 낭떠러지 끝까지 밀어내고선 매달릴 수 있는 팔은 부러뜨리고 딛고 올라설 발엔 생채기를 내버려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었던 시간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움켜 잡는 지푸라기마다 순식간에 바싹 마른 가루가 되어 함께 죽자고 달려드는 유약하고 의지 없는 재뿐이었다. 그저 구해달라는 말만 할 수 있도록 입과 진심 어린 용서와 뜨거운 참회를 할 수 있는 머리만을 남겨두셨다.
어쩌면 채찍이라도 주었던 이들이 나를 죽지 않게 이끌고 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채찍을 든 자들이 내게 말할지 모른다. 너무 밉고 한심하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줘서 고맙다고.
눈은 멀개져서 동태눈깔을 하고 한 순간도 맑게 깨어있는 날들이 없었으며 늘 20.1도 빨간 뚜껑을 한 소주에 의지하고 그저 아픈 이 마음 기댈 곳만을 찾다가 쉬이 몸도 마음도 다준뒤 모멸감과 수치심만을 가슴속 그득 쌓아왔던 사람. 이때다 싶었는지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려 일어설 의지도 포기했던 사람. 매순간 두려워서 더 솔직할 수 없었고 순간의 쾌락으로만 고통을 잊고자 했던 그때 그 시절. 그때에만 할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을 모두 놓쳐버린 뒤 세상을 너무 빨리 알게 되었다며 한탄하기만 했던 날들. 온전한 눈물도 겁이 나 술의 힘을 빌려야 했다. 화를 내야 할 땐 포기했고 포기해야 할 땐 집착했다. 매진해야 할 땐 나태했고 관대해야 할 땐 화를 냈다. 망가짐 속에 절여진 젊은 여자는 다 잃고 깨달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깨달음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강렬한 시간과 사건과 기억과 깨달음은 때로 트라우마로 자리하기도 한다. 조율을 하고 삶에 녹여나가야 하는 것은 모두 나에게 달린 일이다. 얼마가 걸릴지는 모른다. 그저 해보는 것이다. 최대한 투명하게. 최대한 기교없이. 그냥 하루하루 큰 생각 없이 살아내는것 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내게는 적어도 갱생하고자 하는, 이젠 나를 망가뜨렸다고 믿는 누군가를 온전히 증오하지 않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알고 있다. 다시 일어선다는게 그다지 거창한일이 아니라는 것도.
잠에서 깨어나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씩 늘인다면 그게 진정으로 '나'로서 살아가는 일이라고.
그리고 나로 인해 피눈물 흘렸을 이들에게 더 잘사는 모습으로 갚아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