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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물안궁의 삶 Oct 26. 2024

길 위에서 만난 인연 대하듯 모든 것을 다 흘려보내거라

힘들때 늘 목탁을 잡았던 소녀


"젊은 보살 멀쩡히 이쁘게 생겨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곳에서 일하는 거야?"


마음을 비우며 정갈한 상태로 발원을 성취하고자 절에 들러 양초, 쌀, 과일, 향공양까지 정성 들여 올려놓고는 그들은 곧바로 남을 평가하는 일과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속세모드가 된다. 흡사 부처님전에서 가족을 축원하며 1,080배 정진 후 집에가자마자 "당신은 빨래를 이렇게 밖에 못벗어놓냐"는 말부터 먼저 나가고 더 나아가 발원이전에 본인 업장소멸이 하나도 안된 그런 부류중 하나다. 나를 딸뻘로 생각하는 신도, 보살들은 주로 내게 멀쩡히 생겨서 일반 회사에 가지 않고 왜 이런 절에 왔냐고 한다. 보통 하고 싶은 말은 멀쩡히 이쁘게 생겨서라는 앞부분보다 왜 여기서 일해?라는 뒷부분에 있다. 즉 무슨 기구한 사연이 있는건지 궁금해서 일 것이다.


"왜 그럼 보살님은 '이런 절'에 와서 기도하세요?"라고 하고 싶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산세가 강해서인지 나의 넘치는 화의 기운을 잠재워주기에 충분한 절의 분위기가 있다.  그런 생활 속 무시들은 이제 가볍게 넘겨 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이곳에 쉬러 온 거니까, 그럼에도 엄마와 먹고는 살아야 하니 온 것이니 이일저일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

어지간한 폭풍을 몇 년간 온몸으로 다 맞고 이곳에 오게 되니 오히려 다른 모든 것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아, 나 정말 여기서 딱 1년만 쉬었다 가면 좋겠다.'

쉰다는건 마음을 쉬겠다는 의미다.





다시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입사지원서를 넣었던 절에서 합격통보가 왔다. 산사의 새소리를 들으며 허름한 절간의 빈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상주해야 할 것 같지만 서울사찰은 다소 다르다. 산사라고 한들 서울 도심사찰의 특징은 일반 회사와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일하는 것도 봉사, 보시개념이 아니라 4대 보험이 다 적용되고 상근출퇴근제이며 휴가도 보장된다.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기도접수를 받고 인등과 연등접수를 받는다. 그리고 그날 종무소 문을 닫을 시간이 되기 직전 각 전각의 복전함을 점검하고 기도비,인등비,제사비 등 정산을 하는일이다. 특히 곧 대입수능기도와 동지기도를 준비하다 보니 절 내부는 아주 바쁘다. 사실 종무소 회계담당자이자 기도접수 종무원으로 채용되었지만 동지 전날에는 너나 할 거 없이 새알심을 빚기도 하고 김장을 담그는 11월 초가 되면 접수받다 말고 고무장갑 끼고 대웅전 앞마당으로 가서 김치 속양념 버무리기에 바쁘다.  그렇게 모두가 일당백으로 절의 살림을 모든 종무원이 두루 본다.


한꺼풀 어색함이 벗겨지고 조금씩 마음을 내며 가까워질때즈음 마음에 깊은 상처 하나쯤 갖고 있는 종무원들을 알게 될 때마다 내게 왜 멀쩡한 아가씨가 여기 있냐고 물어봤던 그 신도의 질문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저마다 인생의 파도를 두세 차례쯤 연달아 얻어맞거나 어디 가서 팔자가 세거나 기구하니, 평생 빌어가며 살아야 한다는 소리깨나 들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는 속세에 풍파로 인해 사람들과 면대면 하는 것에 환멸을 느끼는 자들도 많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방문 걸어 잠그고 평생 참선하며 누구오도 부딪히지 않는 삶을 살 것 같은 드라마에서 보던 절의 모습은 막상 현실에 없다. 즉 사찰에 와서 또 다른 욕심을 바라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겠다고 생각하거나 사회와 다른 사람들의 결을 기대한다면 십중팔구 실망하고 절간도 똑같네!라고 말하고 말 것이다. 보통 불교를, 절을 겉만 보고 욕하는 사람들은 그런 부류다. 법을 믿지 않고 가르침을 믿지 않고 주지스님들이 옮겨 다니는 사찰로 옮겨 다니거나 유명한 절이라거나 기도빨이 세다고 소문난 절만 골라 다니는 사람들이라던지.


절 역시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곳이다. 세명이상 모이면 작은 사회가 되고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그러하다. 그러나 묵묵히 자기 발원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정진하는 이들도 참 많다. 아마 그 힘으로 절은 운영이 되는 것 같다. 내 기도와 다른 이의 기도와 발원, 염원이 합쳐져 힘이 생기는 그런 곳. 내가 가장 힘들다고 울며 털어놓은 사연 위에 몇 곱절 더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사는 종무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여긴 정말 상처받거나 하나씩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위안하며 사는 곳이 맞긴 하다.




이곳에 있는 스님 중 한 분은 술도 먹고 고기도 먹는다. 분명 종법을 어긴 것이고 더 나아가 오계를 어긴것이다. 하지만 절밥좀 먹은 종무원들은 그런모습을 속으로 욕 할망정 겉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더 정확히는 불교법도엔 내가 먹기위해 살생한 고기가 아니어야 한다는 대목이있지 무조건 고기를 먹지말라고 하진 않았다.  어찌되었든 속세인과 스님의 모습을 반반 취한 마음만은 착한 키가 큰 스님이 내게 법명을 지어주셨다. 어쩌면 맑고 깨끗한 도가 높으신 선승보다 속세인에 가까워 보이는 행색을 한 스님이 지어준 법명이 앞으로 내게 살아가야 할 이 땅에 더 어울리는 이름일 수도 있겠다. 나는 선승이나 높으신 대덕스님에게 법명을 받을만큼 잘 살진 않았으니까. 그마저 근기에 맞는 법명 그리고 율사를 만났다 생각하련다.

나는 그 스님께  법명을 받아 들고 몇일 후 홍대입구 6번출구에 위치한 간판도 없는 어느 타투 업장에 가서  손가락 위에 두 글자를 새겼다. 지금보니 무허가 인것같긴한다.


칼, 쇠붙이에 공포증 있는 나는 당연히 주사도 무섭고 바늘도 무섭다. 닝겔을 맞을때도 굵은 눈물을 떨구는 엄살쟁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타투를 선택했다. 그때의 아픔을 참으면서까지 새기려 했던 마음, 느낌, 아픔을 잃지 말자고 나름 충격요법을 쓴 게 타투다.  그 스님이 내게 내려준 법명은 도연. 길도에 인연연.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을 대하듯이 그렇게 무심하게 흘려보내며 살라고.


그러면서 그 스님은 내게 말했다. 보살 자네는 올해가 날삼재니 올해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꼭 붙어있으라고. 부처님이 자네를 지켜줄 거고, 호법신장님이 자네를 두루 보살펴줄 것이니, 자네 살라고 그 힘든 일 겪고 이곳에 오게 한 것일 테니 꼭 붙어서 출퇴근 때마다 대웅전 가서 삼배올리고 늘 염불진언을 외우며 살라고.




돌이켜 보니 난 어릴 때부터 목탁을 잡고 집전을 하며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이었고 초등학생시절부터는 내 의지로 어린이법회에 참석해 리더를 맡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그리고 중학교 1학년 학교폭력, 왕따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당시에도 주말만 기다렸다. 일요일마다 볼 수 있는 법회의 친구들은 나를 왕따 시키지 않았으니깐. 투닥거리며 싸우기도 했지만 이내 화해했고 서로의 집을 놀러가기도 했으며 나를 동등한 친구로 대해줬으니깐. 나는 같은 사람인데 학교에선 왕따지만 절에 오면 리더가 되고 선배들은 잘한다며 관심을 주었다. 마치 다른 인생을 동시에 사는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복도에서 다른 애들이 다 보고 있는 가운데 종아리를 걷어차이고 양동이물을 뒤집어쓰게 된 일이 있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있는 좁은 집에서 울 수도 없고 밖에서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울 수도 없었던 기억이 있다. 슬픔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모르고 내 마음을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집에 있는 작은 목탁을 들어 덮고 자는 이불을 바닥에 깔고 작은 스님모양의 조형물을 내 앞에 두고 반야심경을 외웠다. 뭔가 법당을 흉내낸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 우스운 행동이다. 그때는 그 모든게 너무 간절했는데 슬픔을 잠재울 방법을 몰라서 혼자 법회를 진행하고 경전을 읽고 읽다 보니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니 마음을 털어놓고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시절 언젠가는 학생 법회를 보며 집전을 하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계속 진동이 울리는 거다. 이미 집에서 나올 때부터 부부싸움을 하고 있는 엄마아빠를 봤기에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30명이 함께 염불하고 있는데 목탁을 내려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없이 모든 진언을 마치고 목탁을 내려놓고 나서야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중전화가 20통은 걸려와 있었고 아빠는 걸어 잠근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엄마를 책 모서리로 찍어내리고 수없는 구타를 가해 둔탁한 소리에 놀란 옆집 아주머니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내용. 나는 그 길로 미친년처럼 그 산길을 내려와 택시아저씨에게 울며불며 부탁해 집까지 달려왔다. 이미 집은 난장판이고 복도에서 안방으로 나있는 창문 창살은 휘어져있었다. 아빠는 절을, 불교를 극도로 싫어했다. 엄마의 마지막 살길이라 여겼던 불교관련한 서적, 경전들을 깡그리 소각장에 가져다 버리는 그런 잔인한 사람이었다. 아마 아빠는 엄마가 종교에 매진해 사는 모습이 이단단체에 빠졌거나 불교와 일반무당이아닌 사기꾼 무당에의 무속행위에 헷갈려 엄마를 정신나간 사람으로 오인했던 것 같다. 내눈엔 아닌게 보였는데 아빠는 그런 눈을 가지진 않았던 것 같다. 나역시 엄마의 그런 지나친 종교신행활동이 싫었으나 크면서 어느정도 이해는 되었다.


그렇게 인생의 암흑기마다 나는  부처님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 도대체 그렇게 찾고 있는 부처님은 어디 계시는지 공연히 원망도 많이 했다. 그리고 서른을 곧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까지도 결국 무너질듯한 현실을 맞이하고 나는 다시 부처님 앞에 섰다.


생각해 보면 부처님은 항상 날 지켜주고 있었다 믿는다. 내 손에 목탁을 들고 경전을 외우고 법문을 외웠기에 크리스천이 성경책을 읽거나 성령에 힘입어 방언기도를 하는 것처럼, 신령님을 믿는 무교의 사람들이 접신한 것처럼 그렇게 삼매에 들어 간절히 발원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살 수 있었다고 믿는다.


절이라는 곳에 저마다 다른 의미일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시작했고 세 번의 풍파를 모두 입고 이제 맨몸으로 다시 이곳에 섰다. 재앙의 힘이, 업보의 힘이 얼마만큼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희뿌연 막 하나가 거둬지기 일보직전에 나는 이곳에 왔고 또 다른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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