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나타났다

by 뷰리플기러기

젠장. 평일보다 두 시간은 족히 일찍 일어나 채비를 하고 도착했는데 장대비가 쏟아진다. 새벽 골프 취소다. 허탕이라고 단정 짓고 돌아가기 전, 우리를 위안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먹을 때마다 영혼의 기쁨을 선사하는 순대국밥 맛집들이 골프장 근처에 몰려있다는 사실이다.


준재벌은 될 정도로 많은 손님의 지갑을 털어가는 그 맛집들이 바지런히 이 새벽에 문을 열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들었다. 일단 스마트폰으로 근처 맛집 이름들을 눌러댔다. 그 맛집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순댓집 사장님, 역시 부지런한 분이셨다. 십여 분 전부터 영업을 하고 있다. 골프 취소의 아쉬운 마음은 바로 털어내고 차를 돌려 그 집으로 향했다.


웬걸, 그 시간에 주차장은 벌써 만차다. 그 집을 지나쳐 멀찌감치 차를 대고 기억 속에 맴도는 진국의 국물맛을 생각하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가로 다섯 테이블, 세로로 예닐곱 정도의 테이블이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는 제법 큰 식당이다. 주차장 만차로 예상했지만, 그 테이블의 반은 이미 차 있다. 영업을 시작한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은 주방과 가까운 곳이다. 나의 정면에 주방의 분주한 상황들이 훤히 펼쳐져 있다. 형광등 불빛에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주방 가구들 사이사이 머리에 두건을 쓰신 이모님들 대여섯 분이 움직이고 계셨다. 그중 한 이모님이 주방을 나서 물과 기본 반찬을 놓아주셨고 우리는 보통 순댓국 네 개를 주문했다.


지인들과 마주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대화가 끊어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젓가락으로 밑반찬을 한 두어 번 집어먹어도 어찌 된 것인지 이모님의 두 번째 출동이 없다. 순댓국을 실은 서빙 카트가 우리 옆을 지날 때면 우리 것인 양 자리를 정돈하곤 했는데 무심하게도 고소한 냄새와 뚝배기 위 흰 연기만을 남긴 채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음식이 나오는 속도는 들어오는 손님 속도보다 현저히 더디다. 우리의 옆, 뒤 테이블에 앉아 계신 분들도 우리처럼 빈 젓가락만 손에 들고 있다.



잠시 뒤, 내 옆 지인의 한마디, "진짜가 나타났네."

지인의 말과 함께 나도 고개를 들어 그녀의 시선을 따랐다. 중년의 이모님들 사이로 어깨 기장의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젊은 이모님이 나타났다. 강렬한 색상의 옷을 입고 있는 여느 다른 이모님들과는 다르게 흰색의 티셔츠와 연한 색의 청바지를 입고 들어간다. 둥근 머리통이 드러나게 윤기 나는 생머리를 질끈 묶고 나서는, 손을 허리로 가져가 앞치마 끈을 단단히 여며 맸다. 여리여리한 손에서 당찬 기운이 느껴진다. 나이나 분위기로 보아서는 종업원이 아니고 사장의 딸이거나 며느리 정도일 것 같다.


‘진짜’의 손은 앞치마 정비를 마치고 음식 그릇으로 옮겨졌다. 국물과 고기를 투가리에 담을 때나 밑반찬을 빈 그릇에 담을 때의 손은 당참을 넘어서 야무짐과 현란함까지 보여주었다. 빠른 움직임 속에서도 ‘진짜’가 담고 있는 깍두기 국물은 그릇 밖으로 한 방울도 새어 나오지를 못한다. ‘진짜’의 빠른 손은 마치 지휘자의 손처럼 주방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고 주방 밖으로 출동하는 이모님들의 수는 현격히 많아지기 시작했다. 서빙 속도가 안단테에서 알레그로로 전환된 느낌이랄까.


겉절이와 깍두기만 깨작이고 있던 우리에게도 드디어 팔팔 끓는 순댓국이 배달되었다. 적당한 새우젓과 들깻가루를 넣고 한 숟갈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이 맛이야.


'진짜가 나타났네'라고 말했던 그 지인의 직업은 변호사다. 나와 그 지인은 아들 한 명씩을 키우고 있는데, 그 지인은 자주 얘기했다. 나중에 아이가 머리를 쓰는 일이건 몸을 쓰는 일이건 어떤 일을 하든 소명을 갖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즐겁게 하면 좋겠다고. 호떡집을 하더라도 즐겁게 호떡을 뒤집으며 일을 하면 좋겠다고.


나 역시 같은 마음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진짜가 되기까지의 시간은 물리적으로도 충분히 필요하고 온 힘을 다하는 양질의 시간도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그날의 순대국밥 가게 속 여리지만 강단 있는 손에서 주어진 일을 몰입해서 최선을 다하는 의지를 보았기에 그 지인은 그 사람을 단박에 ‘진짜’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내가 교육받고 직업을 준비하는 시절에는 전문가, 안정적인 직장인이 되는 선택을 지지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다양해진 것 같다. 의사, 선생님, 공무원, 대기업 회사원과 더불어 크리에이터, 프로게이머, 아이돌, 운동선수, 카페 사장, 필라테스 강사, 웹툰 작가 등등 다양한 직업을 꿈꾸고 지지받는다. 젊은 목수, 귀농한 농부, 20대 여성 도배 기술자들이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자신들이 일하는 모습을 세세히 소개하며 장인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는 것을 체감하고는 있었지만, 티브이 속 대기업 2세, 실장님이 주인공이던 흔한 드라마들 사이에서 자영업자의 성공 스토리를 녹여냈던 '이태원 클라쓰'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을 때 내심 신선하고 파격적이라 생각했다.



직업.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립적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성숙한 사람이라면 선택해야 한다.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계속된 경제성을 띠는 활동으로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한다. 이 말에 순수히 동의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유교 사회에서는 사농공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통장 수입으로 귀천을 규정짓는 잣대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듯하다. 어차피 직업을 평가하는 잣대가 있는 것이라면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그 순댓국집의 ‘진짜’처럼 해나가는 마음이 그것을 결정지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 지인과 나의 뜻은 통했던 것 같다.


17년 같은 일을 해온 나는 과연 진짜인가. 그 진짜 이모님을 생각하며 나는 언제쯤 당당하게 진짜로 나설 수 있을까 나에게 묻는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