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에 정해진 답은 있는 것일까?>
한 연구결과가 있다.
‘AI로부터 우리의 일을 지키기 위해 미래에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약 70%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AI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을 바로, ‘커뮤니케이션’ 능력, 즉 ‘소통 능력’이라고 본 것이다. 인간관계 능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의사소통은 단순히 말을 잘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 내 생각을 잘 전달하는 것, 상대방을 공감해주는 것,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인정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 상대의 말을 잘 이해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 정도면 소통을 잘하는 편 아닌가?’ ‘제랑 대화가 안 통해. 제가 문제야’라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뜨끔했는가? 인정하자. 안심할만한 점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의사소통’ 안에는 굉장히 까다롭고도 많은 조건들이 있기에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교감 시절, 교사들은 나를 ‘민원의 달인’이라고 불렀다.
사실 학교에서 가장 난감한 것이 민원 아니던가? 모두가 교육자로서 교육은 어느 정도 잘한다지만, 언제나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렵기 마련이다. 특히 민원의 꽃, 학부모와의 관계는 언제나 교사들을 힘들게 한다.
어느 학교에나 조직되어 있는 학부모단체는 학부모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학교 활동의 참여를 독려하고 학부모의 요구나 의견을 학교의 다양한 교육 활동에 반영하기 위한 교감의 업무 중 하나이다.
그 과정에선 학부모들과의 만남은 필연적이고, 그 속에는 당연히 어려움과 고충 등 민원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일일교사로 참여한 학부모가 수업 도중 학생들에게 욕을 해서 생긴 민원, 학부모단체의 장이 아들을 때린 학생을 찾아내라며 수업하는 6학년 교실에 찾아가 수업을 방해를 하는 바람에 6학년 학부모들이 들고일어난 민원, 같은 아파트에 사는 같은 학급의 아이들이 아파트 놀이터에서 싸우다가 다친 학생의 엄마가 찾아와서 때린 아이를 강제 전학시키라고 난리를 친 민원 등....
이렇듯 그땐 죽을 만큼 힘들었던 학부모 민원이, 결국 내 소통 방식에 ‘굳은살’을 박히게 해 준 것이다. 민원을 담당하며 겪은 실패담과 성공담은 모두 나의 자산이 되었다.
나중에는 학부모 민원에 관한 이런 지론도 가지게 됐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만 해도 마음이 풀어지고 문제가 해결되는구나!” 그래서 ‘들어주기’에 대한 남다른 장점을 칭찬하며 학부모들과 소통하는데 스스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교장이 되어서도 그 어떤 관계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너무 자만했다’.
‘소통만은 자신 있는’ 초보 교장으로서의 나는 알고 보니 ‘소통도 초보’인 교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느 배우의 수상소감처럼 그동안은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격’이었다.
교장이 되니 학부모 외에 직원, 교사, 외부기관과의 관계 맺기가 더 넓어졌고 다양해졌다. 교감 시절에 해결하던 아이들이 관여되어 있는 학부모 민원과는 새로운 양상이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낙담하고 좌절했다.
초보 교사 시절의 나로 돌아온 것이다. 한 때 ‘민원의 달인’의 별명이 무색하게 다시 제자리걸음이 되었다.
도대체 소통에 정해진 답은 없는 걸까?
<교장이 되어 교육청을 방문하다>
교장이 돼서 가장 처음으로 마주한 장애는 다름 아닌 ‘교육청과의 소통 장애’였다.
방학 때 시작된 학교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3월 학교 개학과 함께 중단된 것이다.
교육청의 담당자가 바뀌고 우리 학교 담당자가 된 신규 직원이 발령 나서는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연락도 없이 한 달 동안 공사 진행이 멈춰있었다.
그 이유를 실장이나 담당 주무관, 시행사 대표 등에게 물어봐도 누구 하나 정확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분명한 이유가 있음에도 말을 해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시행사 대표는 기간이 늘어나자 공사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우선 기다리자’. 그로부터 한 달을 더 기다렸고 연락도 없이 교육청을 방문했고 담당과장을 만났다.
나: 저희 학교 공사가 3월 1일 이후 거의 한 달이 넘게 멈춰 있습니다. 저희 학교 공사가 멈춘 것을 알고
계셨나요?
A : 제가 모두 알 수는 없지요...(이 말에 더 화가 나기 시작함)
제가 승진해서 새로 발령받아와서 이제 3개월밖에 안 되었습니다.
나: (발령받은 지 3개월이나 되었는데도 아직도 관내 학교 공사 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발령받은 지 3개월이 되셨는데도 불구하고 관내 공사현황에 대해서는 파악이 안 되셨나 보네요?
A: 우리 교육청 안에 제가 맡고 있는 공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공사비만 해도 00억입니다. (나한테는 변명으로 들림)
나: 제가 00의 공사가 얼마나 많이 맡고 있는지 알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우리 학교 공사가 지금
3 달 동안 멈춰있는데 왜! 진행이 되고 있지 않은지를 싶어서 온 것입니다. 교육청의 담당 팀장이나
저희 학교 담당 주무관도 알려주지 않으니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서 제가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짐)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담당자로서 한 번쯤 학교를 방문하셔서 말씀해주셔
야 되는 게 아닌가요?
A: 교장선생님이 이렇게 교육청에 와서 이렇게 큰소리로 말씀하십니까?
교육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내 후회로 가슴이 아팠다.
자녀와 관련한 민원으로 학교를 찾아오는 학부모들처럼 마음에 펄펄 끓는 분노를 감추고 방문했다가 화풀이를 해대고 민낯으로 돌아온 꼴이었다.
한 학교의 대표로서 태도와 자세에 힘이 들어갔고 ‘갑’인 상태로 교육청을 방문했다.
대화 시작부터 감정이 통제가 안 되었고 방문한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일방적인 비난으로 시작해서 서로의 난타전으로 기진맥진한 일방적인 대화였다. 너무 화가 나서 그 순간 ‘교육청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을 거야.’ ‘말 못 할 사정이 있었겠지? 들어나 보자’라는 상대방 입장에서의 배려의 작동 기제도 발동되지 않았다.
<불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불통이 된 것일까?
첫째, '쿠션 언어' 없이 바로 본론부터 시작하였다.
‘쿠션 언어’란 ‘핵심적인 말을 하기 전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사용하는 배려가 깔린 완곡(婉曲)한 표현’으로 불편하거나 갈등을 빚을 수 있는 상황에서 사용한다. 쿠션 언어를 잘 사용하면 주변의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고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쿠션 언어나 일상적인 이야기로 분위기 부드럽게 시작해야 함에도 바로 방문한 용건으로 급하게 따따부따~~ 그동안 참아 온 이야기를 급하게 쏟아냈다. 담당과장 입장에서는 성급하고 무례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
학교 대표라는 달라진 위치 때문인지 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말을 듣지도 않고 자꾸 중간에 말을 끊고 상대방을 공격했다. 찾아간 교장에 대한 배려도 없이 교육청의 고압적인 자세와 태도가 오히려 화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였을 상황으로 결국에는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둘째, 교육청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있었다.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문제를 되짚어보니 내 생각의 틀 속에 10여 년 전 장학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느꼈던 교육청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여전히 변하지 않았겠지 ‘라는 편견이 작용했다. 교육청에 부서가 내가 근무할 때보다 대폭 늘어 빨리빨리 학교현장을 지원하라는 것인데 여전히 늦장 부리고 탁상행정을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셋째, 방문 목적을 잊은 대화였다.
알고 싶은 내용을 간단히 질문하면 되는 것이었다. 방문 목적은 왜 공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는지와 언제 다시 진행되는지 알고 싶은 것이었다. 간단하게 이 두 가지를 질문하고 답변을 들으면 되는 것임에도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단지 기분이 상해서 말꼬리를 잡고 말싸움한 것이 지나지 않았다.
교장으로서 학교의 교직원 아닌 다른 직속기관이나 유관기관 기관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소통’이 나에게 다시 큰 벽처럼 느껴졌다. 실망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한때 '민원의 달인'이 아니었던가?
인권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의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는 말처럼 새로운 각오로 ‘소통’의 벽을 눕혀 ‘소통’의 다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소통의 벽>을 두드리고 건너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소통의 달인> 이라는 상상하지 못할 자리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