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만약이 있었더라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뽀글한 머리의 천재의 상징,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런 말로 본인의 불쾌한 심기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살아있을 동안 그는 그렇게나 양자역학을 싫어했다고 한다. 살아있는 고양이와 죽어있는 고양이가 같이 상자안에 존재하는 세상이라니!)
그런데 역사책을 살펴보다 보면,
신은 의외로 주사위를 좋아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과학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무언가 그 원인을 찾지 않는다면 몸이 근질거리겠지만, 이곳 서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합리적으로 예상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화청지 뒤쪽에는 조그만 동산이 있다.
여산(驪山)이라 불리는 이곳은 오랜 시간 화청지의 인간군상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거다.
1936년 12월 12일 저녁.
이곳 여산 주변으로 무장한 군인들의 총격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고함소리와 총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한 중년의 남자가 여산의 바위틈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잠옷 차림에 손과 발바닥은 피투성이인 모습.
그를 수행하던 군인들은 이미 운명을 달리하거나 흩어져버렸다. 여산 주위로 색색 군복의 군인들이 급박하게남자를 쫓고있었다.
반드시 생포하라. 죽이면 안 된다.
추격대의 젊은 군관이 외치고 있었다.
혼란한 사람들 사이에서 겁에 질린 남자는 차가운 돌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남자는 숨죽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 속을 파고들었다.
적습인가? 일본군인가?
그러기엔 전선에서 너무나 먼 거리였다.
가까워지는 발걸음과 산발적인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머릿속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죽을 수도 있다.
불길한 상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지친 몸을 돌벽에 기대고 그는 생각하였다.
내려가자…
어차피 이곳에서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군인답게 죽으리라,
운이 좋다면 나름의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거다.
저기 한 무리의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서서히 몸을 일으킨 남자는 절뚝이는 발을 끌며,
그쪽을 향해 내려갔다.
이 남자의 이름은 장개석(蔣介石, 장제스).
며칠 전부터 그는 서안의 화청지에 도착해 있었다.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난 역사의 패배자로 여겨질 수 있겠다.
잘 나가던 재벌집의 폭망스토리가 열광하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에서 그의 몰락 이야기는 더욱 서민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하지만,
적어도 1930년대의 중국에서 그의 승리를 의심하는 이들은 찾기 힘들었다.
1925년 손문(孫文, 쑨원)이 사망했다.
이제 중국 국민혁명군 대원수에 오른 장제스는 가장 먼저 골칫덩이를 제거하기로 한다. 중국 농민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던 공산당이 그들이었다.
"앞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적은 강대한 일본이야,
그렇다면 먼저 내부단속부터 시작해야지."
장개석이 만사를 제쳐두고
이곳 서안까지 날아온 이유도 바로 공산군 때문이었다.
1934년,
장개석은 대대적인 공산군 타도작전을 벌여 남부지방의 공산당 거점을 쓸어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뿌리가 뽑혀버린 중국공산군은 목숨을 건 도주작전을 벌이게 된다.
9,700킬로미터,
그 대부분을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하는 길.
상식적으로 저 거리를 걷는 것이 가능할까?
혹여 걸어서 극복했다고 한들 힘 빠진 이들이 위협이 될까?
중국인들은 무심한 눈으로
이들의 이동을 바라고보 있었다.
그런데 이 공산당들의 위세가 심상치 않았다.
끝난 줄 알았던 놈들이 불을 끄면 기어 나오는 바퀴들처럼 슬금슬금 규모를 늘리더니 이제, 중국 대륙 여기 저기서 다시 이들의 붉은 깃발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이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면서도
절대 서두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야 말로 이놈들의
뿌리까지 뽑아서 엎어 놓으리라.'
이런 그에게 이 지역을 맡은 국민당 군대의 굼뜬 움직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 서안에서 나타나는 싸울 힘도 없어 보이는 공산군에게 국민당 군대는 계속해서 패배하고 있었다.
화가 나기 시작한 장개석은
직접 상황을 보기 위해 이곳 서안으로 달려왔다.
"이 놀기만 좋아하는 아편쟁이 장군놈은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거야.
군대를 지휘할 생각이 있는 놈인가!
저런 산적같은 놈들 하나 처리를 못하냔 말이야!"
서안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간을 조금 앞으로 돌려 총격사건 며칠 전,
장개석의 앞에서 한 남자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왜 동북의 일본놈들을 가만히 놓아둡니까.
저들이 벌써 북경 코앞인 산해관까지
진격해 온 것이 안 보이냐는 말입니다!”
"저 공산군놈들이 먼저요.
어떻게 집안 정리도 않고 바깥일을 도모한단 말이야!"
그는 어제까지 중국 만주지역을 호령하던 군벌 장학량(張學良. 장쉐량) 이였다. 그런데 그의 군대는 이미 밀릴 대로 밀려 모든 본거지를 상실한 상황이었다.
그는 장개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거지꼴을 하며 산속에 숨어있는 저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에게 낭비할 탄약이 있다면 차라리 민족의 적, 일본군에게 쓰는 것이 나으리라.
하지만,
위탁교육 과정으로 소련에서 시간을 보내며
공산혁명의 실상을 본 장개석의 생각은 달랐다.
붉은 사상은 재산이 없는 이들에게도, 지식이 많은 이들에게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조금만 방심하다간 볼셰비키 혁명의 다음 종착지는 바로 중국 대륙이 될 것이었다.
그의 눈에 대일전쟁을 외치는 장학량은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에 불과했다.
조금만 더 목을 조르면 된다.
이미 소비에트 정부의 중재로 비밀리에 우리에게 유리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산군이 국민당군으로 들어온다면 그들을 앞에 내세워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가능하리라.
장개석은 강한 압박을 가할 것을
그의 지휘관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서안의 매서운 겨울바람만큼이나 장학량의 마음 역시 황량하고 다급하였다는 것을…
12월 12일은 한국처럼
중국에도 특별한 날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는 이 날이 <서울의 봄>이 끝장난 쿠데타 날로 기억된다면, 중국에서 이날은 장개석이 쿠데타로 강제로 체포되어 구금되게 된 날로 기억된다.
사건을 일으킨 이들은 장학량의 동북군,
이들의 목표는 장개석을 구금하여 최종적으로 공산군과의 싸움을 멈추고 일본과의 전쟁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었다.
장개석을 잃은 남경의 국민당 정부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전투기들을 보내 서안 상공을 선회하게 하여 동북군을 압박하였고, 남경정부에서는 장개석을 구하기 위해 폭격을 포함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조치의 문제가 있었으니 폭격으로 그가 정말 죽어버리면 안 된다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개석 자체가 인간방패가 되어버린 것이다.
폭격을 해야할까?
대원수가 만약 공습으로 죽기라도 한다면... 그 뒤는 누가 이을 것인가? 아니 이 시점에서 누가 이런 멍청한 짓을 일으킨단 말인가?
중국의 교과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서안사변> 이 라 부르는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순수한 구국의 마음이 가득했던 장학량이 장개석의 독단적인 동족 토벌조치에 반대하여 정변을 일으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그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구속하고 협상도장을 찍는다고 한들, 그 계약이 효력이 있을까?
(어느 법이 이것을 허락해 줄까?)
차라리 장개석을 처단하였다면 어땠을까?
민족을 토벌하는 우두머리를 처단했다는 명분을 세우기는 좋겠지만, 장학량은 그럴 능력도 배짱도 없었다.
장개석이 죽으면, 당장 국민당의 보복으로 공포에 질린 동북군이 본인의 목을 매달려할지도 모른다.
이제, 막상 목표를 잡았는데 서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눈만 뜨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안은 정신을 차린 국민당 군세에게 포위되어 가고 있었다.
최근의 연구들을 보면
'서안사변' 에 대한 기존과 다른 해석들이 보인다.
흩어지고 비밀스럽던 자료들이 취합이 되면서,
새로운 사건의 모습이 보인다고 할까?
래너 미터(Rana Mitter) 같은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선,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사이에 이미 비밀리에 협상이 진행 중이었다. 협상 내용에서는 공산군은 국민당군에 속하여 항일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이 이미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결정이 내려진 것은 공산당 자체가 와해된 상태에서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장정을 끝냈지만 그들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집단이었다 (일단 산길을 걸어서 30킬로미터만 가보자, 그리고, 그 300배의 시간을 걸어가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자...)
또 다른 자료에서는 소련의 스탈린 역시,
중국공산정부에게 국민당과 협조할 것을 강하게 푸쉬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장개석은 분명 공산주의자기도 하지만, 또한 반일주의의 선봉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죽어버린다면?
이미, 국민당이나 공산당에서 일본과 협력하여 자신이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연안의 공산주의자들은 사로잡힌 장개석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이 체스판의 디폴트 값 이었다.
그렇다면, 장학량은?
장학량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이미 비밀리에 접촉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명분이 필요했던 그가 내세운 이야기가 하필 비밀협상의 내용이었다(어쩌면 당시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장학량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장학량은 <서안의 봄>을 왜 결행한 걸까?
화청지의 새벽을 시끄럽게 만들면서,
이미 그는 넘어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평소에 피던 아편의 양을 더 늘렸던 걸까?
아니면, 잃어버린 동북지방이 너무나 간절했던 걸까?
단순한 해석으로 그의 행동을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연구가들의 말처럼
'그에게는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게 느껴졌다'는 것이 힌트가 될 것 같다.
장학량은 장개석이 서안으로 오면서
자신의 지위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느꼈고,
장개석은 그런 장학량의
다급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택동은 이 체스판에서
장개석이 꼭 필요한 말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스탈린은 그런 모택동의
머리 위에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서안의 사건은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상을 거쳐 끝이 난다.
사실 그 방법 밖에 없었을 거다.
국민당 정부에서는 우선 그를 살려야 했고,
공산당은 아직 그를 죽일 실력이 없었다.
양 측 모두에게 아쉬운 상황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중국공산당은 화려하게 복귀한다.
이제 '항일전쟁'이라는 목표 아래, 그들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근거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장개석은 이 사건으로 인해,
공산세력을 제거하지 못하였고 결국
커다란 중국대륙을 잃어버리게 된다.
장개석을 따라 남경으로 내려간 장학량은
당연히 감방에 갇혀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심지어 대륙에서 밀려, 타이완 섬으로 도망가는 와중에도 국민당 정부는 알뜰하게도(?) 장학량을 챙겨서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1936년 시작되어 1993년까지...
부분적인 면회나 외출은 허용되었지만,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죄인,
그렇게, 장학량이라는 인물은
세상에서 잊혀져야 하는 존재였다.
북경의 찬바람이 들기 시작한 때,
작은 카페에서 중국친구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주제까지 닿았다 (참고로, 장학량은 중국 공산당 정부의 입장에서는 역사를 구한 위인이다)
얼마나 미웠으면 그랬을까
봇짐 싸듯 장학량을 배에 실어
타이완까지 옮겨간 장개석의 세심한 복수에
의외로 중국친구들은 장개석의 인간적인 감정을 쿨하게 이해하는 듯했다.
나는 한때 인터넷과 공중파를 떠돌았던,
송미령(宋美齡, 쑹메이링) 과 장학량의 로맨스에 대해 물어보았다.
(장개석의 부인이었던 그녀가 장학량과 내연의 관계였고, 장학량이 이 사고를 치고도 사형당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부탁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무려 서프라이즈에 나왔던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은 코웃음을 쳤다.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역사의 흐름이 바뀐다고?
유부남 친구는 천천히
결혼생활이란 어떤건지 지도해 주듯이 이야기했다.
"오히려 부인에게 그런 요청을 받았다면,
화가 나있던 장개석이 어떤 방법으로든 장학량을 죽
이지 않았을까? 이놈이 내 마누라까지 건드렸구나 하
면서 말야."
이런 해석도 일리가 있다.
아니 더 타당하지 않을까?
나는 우리나라의 미디어에서 정설처럼 소개되던 그 가쉽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 친구가 조용히 밖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가 타이완에 쫓겨가 바라본
새로운 중국은 어땠을까요,
과연
그가 원하던 모습이었을까요?
잔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국화잎을 보면서
서안에서의 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중국대륙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한국전쟁도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깔끄러운 질문에 대답을 피하려는 듯,
모두가 웃으며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잘 꾸며진 중국식 마당 가운데,
작은 회오리가 치고,
나뭇잎들이 어지럽게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문득,
지금 이 자리의 앉은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변화라는 큰 회오리가 불어오면
우리는 제 자리 조차 지키지 못하고 나부낄
나뭇잎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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