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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로 Nov 03. 2023

난생 처음 고구마 10kg를 샀다

퇴사 후 달라진 일상 2.

고구마를 10kg씩이나 사려던 건 아니었다. 


퇴사 후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어느날 아침 나는 등산이 하고 싶어졌다. 차를 20분 타면 갈 수 있는 300미터 짜리 산이 있어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왔다. 오랫만의 가을산에 올라간다는 생각으로 설레였는데 산을 오르기 전 산 옆에 있는 농장에서 막 고구마를 캐 박스에 담고 있는 부부를 보았다. '여기 농장이 있었나' 생각하며 가던 길을 갔다. 오랫만에 산에 오르니 너무 좋았다. 평일 오전임에도 산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맑은 공기, 자유로운 시간, 등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퇴사 때문에 복잡했던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산이 주는 위로


왕복 한시간. 운동하기 딱 좋은 산이었다. 한껏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산을 내려와 다시 그 농장 앞을 지났다. 박스에 담겨진 고구마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작업을 마친 농장 부부는 작은 천막 아래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왜 내 발걸음이 농장 앞에 멈춰섰을까. 고구마라고는 누가 주지 않으면 굳이 내가 사서 먹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가끔 마트에서 고구마 한봉지를 사놔도 냉장고 한 구석에 놔뒀다가 곰팡이가 피어서 버리곤 했다. 여유로워진 마음 탓일까. 나는 상쾌한 바람과 탁트인 하늘 아래 있는 농장 앞에 멈춰섰다. 울타리 근처에서 고구마를 보며 서성거리고 있으니 농장 부부가 커피를 들고 나오신다. 나의 엄마 아빠뻘 되보이는 인상좋은 부부셨다.


나: 안녕하세요. 고구마 조금씩은 안파세요?

아저씨: 10키로씩 팔아요~

나: 오래두면 안먹고 상해서요.

아저씨: 어떻게 보관하시는데? 고구마는 냉장보관하면 안되요. 사람 손 타지않게 그냥 베란다에 박스째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1년도 가요~

나: 아.. 그래요?


양이 너무 많아 고민하고 있으니, 인심좋은 아주머니가 커피랑 같이 드시려고 쪄놓은 고구마를 먹어보라고 건네주신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제 고구마를 쪄먹을 시간이 있다, 퇴사 후 아침도 잘 챙겨먹기로 했는데 아침마다 고구마를 쪄먹으면 될 것 같았다. "살게요~" 하고 계좌로 돈을 보내고 고구마를 샀다. 집에 도착해 10kg 박스를 들고 올라가는데 괜히 샀나, 안 먹어서 다 버리면 어쩌지 싶었다. 

베란다에 들여온 고구마 10kg


걱정이 무색하게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 7시에 고구마를 찌는 게 아침일과가 되었다. 고구마를 쪄본 적이 없어 어느 날은 속에가 잘 안익고 어느 날은 너무 물렁했다. 며칠 실패를 겪어보니 20분 정도 찌고 5분 정도 불끄고 놔두는게 딱 좋았다. 


아침에 고정메뉴가 있으니 너무 편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믹스라떼와도 너무 잘 어울렸다. 이렇게 딱 좋은 아침 메뉴라니. 퇴사 후 소소한 기쁨을 또 하나 발견했다. 고구마 10kg가 주는 기쁨. 한동안 고구마 찌기는 내 아침루틴이 될 것 같다. 

근데 이만큼씩 먹어서 언제 다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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