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등기관사 첫 승선과 고립
관짝 속 이야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래는 이렇게 쉽게 드리면 안 되는 건데,
오늘은 당신께 특별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축하합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삼등기관사’입니다!
배에 발을 들이면 가장 먼저 주어지는 타이틀이죠.
그러니까, 이제부터 본격적인 ‘밑바닥’의 시작입니다.
“어디 학교 나왔노?”
배에 오르자마자 들려오는 첫 질문.
해상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대학 파벌이 존재합니다.
부산 vs 목포
안 그래도 출신으로 줄을 세우는 세상인데,
협소한 철골 구조물 안에서도 출신은 작동합니다.
상급자가 출신이 같다면? 혹은 반대라면?
그저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선상 생활이 작게는 눈치 싸움, 크게는 텃세로 얼룩질 수 있습니다.
승선하여 선장과 기관장에게 첫인사를 마치면, 당신은 드디어 기관실로 내려갑니다.
그곳은... 국경 없는 혼종의 세계.
외국인 반, 한국인 반.
공용어는... 영어라 하고, 섞어 말하기.
“헤이 제임스! 슬러지 빨리빨리 클리닝 해라! 오케이?”
“Okay Sir! But now… Third engineer is coming!”
“임마, 뭐라 카노?”
서로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는 100 데시벨의 소음 속.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뱃놈어'로 하루가 흘러갑니다.
그 와중에 당신은 기관실 최하계급.
삼기사.
주어진 일을 잘 해내보려 하지만, 어리숙하기만 합니다.
기계정비 업무는 물론이고, 서류업무도 잔뜩입니다.
“마, 삼기사요. 퍼뜩 날라 보이소!”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고는 하급자도 당신을 무시합니다.
“야, 삼기사. 서류 또 틀렸냐?”
상급자는 당신의 업무실수를 나무랍니다.
안 그래도 업무들도 익숙하지 않은데, 잡무도 쏟아집니다.
커피도 타 오라고 하고, 볼펜도 챙겨 내려오라고 하고,
저녁 메뉴도 외워오라고 하고...
불합리하다고요? 신고하고 싶다고요?
한번 해보십시오.
전화는 터지지도 않고, 인터넷은 연결이 끊깁니다.
당장 배를 그만두고 싶다고요?
써보십시오, 사직서.
대체복무 중이면 내리는 순간 군대로 끌려갑니다.
그도 아니면... 바다에 몸을 맡기시겠습니까?
바다 위에서 사직서는 그냥 종이입니다.
망망대해 한복판에선, 어떤 시스템도 탈출구가 되어주지 못하죠.
그래서 버팁니다.
참다 보면 매달 400만 원쯤은 통장에 찍힙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돈으로는 치킨 한 마리도 당장 시켜 먹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주문은, 배달기사에게 닿을 수 없습니다.
배달앱, 영화관, 가족, 친구, 연애.
바다는 이 모든 것과 단절된 곳입니다.
겨우 친구들에게 SNS로 하소연 해 보려 했지만, 당신은 전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한국과 시차가 생겨, 친구들은 모두 잠에 들 시간이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답답한 마음을 뒤로 하고 당신도 잠에 듭니다.
그래도 6개월쯤 지나면 하선하겠죠.
그땐 조금 숨통이 트입니다.
맛집도 가고, 여행도 가고, 사람도 만나게 되죠.
그러다 사랑도 찾아옵니다.
“무슨 일 하세요?”
“배 탑니다. ...기관사예요.”
상대방의 표정이 멈춥니다.
“네? 6개월씩 한국에 없다고요?”
요즘 군인은 100일 휴가도 못 기다려 헤어진다는데.
6개월?
‘누가 해주냐고요, 그런 연애를?’
반문하고 싶어도...
어느 순간,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연애도 어렵고, 결혼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물론 돈은 남들보다 좀 더 벌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돈을 누구와, 언제,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이쯤에서 묻겠습니다.
갓 대학 졸업한 스물네다섯 청춘이, 이런 삶을 자처하겠습니까?
‘누칼협?’
네, 칼은 들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건 분명, 천천히 삶을 죄여 오는 관짝 속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