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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맥주

by 송대근

벨기에를 출항하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한 달 반,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번 스케줄 역시 살인적이기는 마찬가지라, 밤낮없이 작업이 진행되었다.



쪽잠을 자던 찰나, 어느 순간 잠이 달아나 버려 잠이 오게 만들 생각으로 책을 집어 들었는데, 결핍이 뇌와 인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건강한 사람을 생명을 잃지 않을 정도로 굶기는 실험을 진행한 뒤, 다시 건강을 되찾고 음식이 풍부해져도 그 사람의 뇌는 음식에 대해 계속 집착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즉, 각인효과다.


그러한 관점에서 내가 왜 그토록 맥주에 환장하는지를 떠올려 보았다.

지닌 중독성은 둘째 치더라도, 다른 술은 먹지 않으면서 맥주만 찾는 나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나의 20대, 주머니가 가벼운 시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술은 소주, 아니면 막걸리였다.


소주에 번데기탕이 가장 자주 선택하던 구성이었고, 여름에는 막걸리에 과자 정도를 마셨다.


맥주같이 잘 취하지도 않고 비싸기만 한 술은 누군가가 사주는 술자리가 아니고서는 먹기 부담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맥주에 대한 결핍이 생겼을까? 동아리나 개총 같이 회비를 모아 먹는 자리에서는 맥주는 경쟁적으로 먹게 되는 술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 군인이 되었을 때도, 한 달에 한 박스씩 보급으로 나오는 맥주는 무언가 양이 부족했다. 물론 이전에 사로잡힌 결핍이 더 강화되는 경험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의 보급맥주를 훔쳐먹곤 했을 정도로 결핍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시간이 지나, 나에게 맥주는 단순 취함을 넘어 얻기 힘든 성취, 가치, 만족 등을 전해주는 가치로 자리 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덧 시간이 지났다.


벌써 서른 중반이고, 이제는 맥주를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맥주에 결핍을 느낀다는 것은 내 뇌에 각인된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이고, 거꾸로 그것을 뒤집기도 어렵다는 이야기가 된다.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다.

상처를 치료할 적기가 이미 지나 흉터가 남아있을 뿐.


'내가 상처 입은 건 ~때문이야.'

라는 생각. 얼핏보면 정당한 이유를 찾는 행동으로 보이는, '탓'은 아무런 개선을 불러오지 못한다.

그러나 인정은 다르다.


'그래, 난 상처 입었어.'

탓은 정당화의, 인정은 개선의 첫걸음이다.

더 나아지기 위해. 오늘도 난 생각한다.



'그래 나 알코올중독이야. 그럼 어떡해야 되겠어?'

부끄럽지도, 숨길 것도 없다.

내 흉터를 가지고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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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