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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열 올라 죽겠네.

by 송대근
“진짜 열 올라 죽겠네.”


상견례 날, 날씨는 나를 배신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꽃샘추위가 매서워 얇은 외투로는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그래서 고르고 골라 도톰한 재킷을 챙겼는데, 갑자기 한낮 기온이 26도까지 치솟았다.


가뜩이나 긴장된 날.

식당까지 걸어오는 길 내내 속이 끓었고, 재킷 안의 셔츠는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오늘 상견례에 유일한 ‘따뜻함’이 될 줄은.




장소는 한식당이었다.

여자친구 가족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정확히 약속 시간에 맞춰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사돈.”

장모님이 먼저 일어나 인사를 건네셨다.

장인어른도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미셨고, 우리 어머니는 그 손을 반갑게 마주 잡으셨다.

짧고 정중한 웃음들. 다행히 시작은 부드러웠다.


“예비사돈 되시는 어머님은... 요즘 날씨가 참 오락가락하죠?”

어머니는 원래 말재주가 없는 편인데,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덜어보려 애쓰셨다.

그런 모습은 내게 낯설게 느껴졌다. 어머니도 긴장하고 계신 것이다.


이어서, 아버지가 입장했다.


목례 한 번. 그게 전부였다.

악수? 시선 마주침? 그런 건 없었다.

예절 같은 건 번거로운 형식이라는 듯, 조용히 의자에 몸을 기대셨다.


그 순간 공기가 한 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두 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잽싸게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이 자리에서는 대화가 끊기는 순간, 고요는 부담이 된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시작된 건 대화가 아니라 침묵시위였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은퇴한 교사셨다. 사람을 다루는 데 익숙한 분들이라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애쓰셨다.

“우리 애가요, 초등학교 땐 말이죠... 하하...”

회상과 농담이 이어졌지만, 분위기가 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버지는 음식 쪽으로만 고개를 돌렸다.

마치 반찬 가짓수를 세는 것처럼, 테이블 위를 훑어보셨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표정도 없이.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여셨다.


“여기 밥 좀 먼저 주세요. 밥이 없으니 허전하네.”


정적.

아버지의 말은 대화의 시작이 아니라 대화의 종료처럼 들렸다.

누구도 웃지 못했고, 장모님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걸 나는 분명히 봤다.


장인어른이 반사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네요. 밥을 같이 먹어야 간이 맞겠네요.”

웃으며 던진 말이었지만, 웃음은 상대방에게 닿지 않았다.

아버지는 시선을 들지 않고 밥공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대화는 어긋났고, 이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장모님은 식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셨다.

“애들이 결혼식을 안 하겠다니 준비할 게 없어 섭섭하긴 하네요.

그 말은 잘 던진 공이었다.

어느 쪽이든 받기만 한다면, 대화가 열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공을 받는 대신 밥 위에 김치를 얹었다.

소리 없이, 대답 없이.


식탁 위의 공기는 더 뜨거워졌고, 땀은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어머니가 다시 말을 꺼내려했지만, 입을 여는 타이밍을 놓쳤다.

말주변이 없던 어머니는 결국, 조용히 국을 뜨기만 했다.


장인어른은 허리를 폈고, 고개를 살짝 돌려 먼 산을 보듯 시선을 회피하셨다.

장모님의 젓가락은 빈 그릇 위를 맴돌기만 했다.

그때 장모님의 미간이 보였다.


잠깐, 하지만 분명히.


한 겹, 두 겹...

어떤 말들이 주름이 되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나는 알 것 같았다.



'한마디'가, 지금 이 방 안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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