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글이가 팔려 간 다음 해 어미 소는 다시 송아지를 낳았다. 여전히 송아지의 눈은 동글고 예쁘지만 동글이 때만큼 많은 옥시토신은 분비되지 않았다. 난 변함없이 쇠죽을 쑤고 꼴을 베어 에미 소에게 주고 송아지를 귀여워해 줬지만 더 이상 이름까지는 붙여 주진 않았다. 그래도 소는 나에게 행복한 감정을 주는 우리의 식구였다. 비록 그 옥시토신의 양은 줄어가고 있었지만.
이 글을 쓰며 같이 읽는 최인철 심리학 교수의 책 ‘굿 라이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인간의 감정도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슬픈 사건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의 감정 상태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기쁜 사건으로 인해 경험하는 강렬한 희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약해진다. 이 역시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항상성의 작동 결과이다. 희열의 상태가 너무 장기간 지속되면 일상적인 생활을 해 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쁜 일과 슬픈 일의 사이의 사이클 곡선 속에서 나는 나이 들어가면서 최상 변곡점과 최하 변곡점의 중간에서 평정심과 항상성을 찾되 그 평균선을 되도록 높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아마 그것이 성숙일 것이다. 그러나 동글이가 팔려 간 당시에는 분명 그렇지 못했다. 동글이가 사라지니 내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아궁이 앞에서 풀무를 돌리며 쇠죽을 끓이는 일은 관성적으로 계속했지만, 차츰 어디인가에 내가 찾아야 할 파랑새가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며 항상성 평균점 이하의 슬픈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펜팔 친구를 원합니다. 제 이름은 충남 예산군 오가면 00리, 00 국민학교 5학년 이규숙입니다.”
아궁이 앞에서 풀무를 돌리던 중 듣던 어린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주소를 재빠르게 기억하고 바로 공책 한 장을 찢어 편지를 썼다. 누런 얇은 봉투에 연필로 주소를 또박또박 쓰고 밥풀떼기 하나 남겨와 함봉하고, 학교 옆 학고방에 가서 우표를 사서 침 발라 붙인 후, 그 가게 나무 기둥에 매달려 있는 빨간색 우체통에 까치발 딛고 서서 간신히 집어넣었다.
당시 우편의 왕복 속도를 알기에 한 열흘은 초조해하지 않고 행복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우편배달부는 누렇게 빛바랜 큰 가방 끈을 어깨에서 옆구리로 가로질러 맨 채, 일본 순사 같은 큰 모자를 쓰고 하루에 한 번, 아홉 굽이 고개를 넘어 뚜벅뚜벅 걸어왔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은 배달부는 오지 않았다. 배달부는 이 십리 떨어진 면소재지 우체국에서 산 길 따라 우리 마을까지 오는 고된 직업이었지만 시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일한 행복의 전령사였다. 집집마다 방문해서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 멀고도 힘든 일인지라 늙은 배달부는 꾀를 부렸다. 그는 오후 두세 시경 5, 6학년 교실에 나타나 하교하기 직전의 애들에게 각각의 동네에 갈 편지의 배달을 부탁했다.
그 여학생의 답장을 기다리던 동안만은 행복했다. 그러나 결국은 꿩 구워 먹은 소식이었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그녀가 파랑새 일리는 없었는데 나는 그것을 깨닫는 데 열흘이 걸렸다. 다시 항상성 평균점 이하로 내 행복의 사이클은 떨어졌고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아침, 우리 학교 교문 앞에서 등굣길의 3학년 여학생이 버스에 치여 죽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려 물 구덩이가 생긴 신작로에 놓인 가마니 덮인 어린 시체를 보았다. 얼굴은 가마니에 가렸지만 두발은 가마니 밖으로 나왔는데, 한 발엔 꽃무늬 있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고, 다른 발은 맨발이었다. 태어나 처음 본 주검이었다. 그 애 아버지는 교실마다 창문을 열고 안을 향해 죽은 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다녔다. 동글이와 우시장에서 생이별하고 홀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어미 소의 눈처럼 그 애 아버지의 눈도 멍하니 흰자위가 올라온 채 45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고, 시선을 내리면 여지없이 눈물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잃고 그토록 비통해하는 소와 사람의 얼굴을 다 본 것이었다.
그보다 3년 전 겨울, 사촌 큰 형님의 전통 혼례식 다음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큰 아버지는 삼베옷에 짚신 그리고 머리에 동아줄 같은 것을 쓰시고 문상객이 오면 아이고아이고 하면서 우는 척하시다가 문상객과 맞절하고 나면 허허 웃으시며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래서 처음 경험한 내 가족의 죽음이었지만 죽음이 마냥 슬픈 건만은 아니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호상이라며 밤낮으로 천막 아래 모여 앉아 막걸리와 국수를 마시며 먹었고, 양조장에서 바쁘게 배달 온 청년은 짐 자전거 양쪽에서 내린 한 말 들이 참나무 막걸리 통을 부엌 앞 키 큰 항아리에 연신 붓고 있었다. 늙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새끼를 잃은 슬픔의 차이였을까?
그 소녀가 죽고 며칠 후, 전교생이 줄을 서서 지루하게 듣는 운동장 조회에서 연단 위 교장 선생님은 심각한 훈시를 하셨다. 차 조심하라고. 며칠 전 죽은 소녀처럼 되지 말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질문을 하셨다.
“여기 죽고 싶은 학생 있으면 손들어 봐”. 연단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서있던 나만 조용히 손을 들었다. 교장 선생님은 더 이상 말을 못 하시고 조회를 끝내셨다. 그날 교장 선생님은 아버지를 만나 심각하게 이야기하셨다. 아버지는 따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는 크게 노해 야단치셨다. “세상에 별 일 다 보네! 에미 아비 다 살아 있어 밥 먹여 주고 학교 보내 주는데 왜 죽고 싶다는 거야 이 못된 놈아! 쪽다리 밑에서 주워 것도 아닌데…”
그 뒤 나는 조용히 책 읽는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큰 형님이 읽던 ‘김삿갓”이었다. 세로 쓰기 두 단으로 인쇄된 조그만 글씨의 책인데 재미가 솔솔 났다. 큰 슬픔을 이고 정처 없이 조선 8도를 떠돌다가 난 체하는 양반을 만나면 중의적인 시로 조롱하고, 겨울에는 시를 아는 처녀를 만나 잠시 인연을 맺기도 하다가 봄이 되면 훌쩍 떠나가는 그의 인생이 너무나도 멋있었다. 나도 크면 이 집을 나가 전국 아니 전 세계를 방랑하리라! 그 꿈이 슬픈 변곡점 바닥을 찍고 항상성을 향해 상향 곡선으로 돌아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방랑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한 번도 안 가본 고개를 넘어갔다 오고, 완행 버스가 뽀얀 먼지를 꽁무니에 혜성처럼 달고 사라져 버리던 먼 산 고개까지도 왕복했다. 소를 타고 다닐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 등에 타는 연습도 했다. 논 일하고 돌아오는 소 등에 올라 타 주막거리를 개선장군처럼 지나서 집에 오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안장도 없이 맨 등에 잘 탄다고 칭찬을 했다. 소 달구지에 타면 덜컹거리니 엉덩이가 아프지만 소 등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무튼 죽지 않고 읍내 중학교에 진학했다. 학교까지는 신작로 자갈길을 따라 십 리 길이었지만 이 십리 길을 통학해야 하는 애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 둘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생각을 바꿨다. 걸어서 방랑할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더 빨리 더 편하게 전국을 돌아다닐 것 아닌가. 아버지에게 졸랐더니 다음번 일제 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면 사준다는 약속을 하셨고 곧 나는 새 자전거를 받았다. 형들은 질투했다. 그들은 걸어서 졸업을 한 중학교였다며. 그렇지만 동글이와의 이별 후 처음 찾아온 비슷한 수준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얼마 안 갔다. 두 살 아래 막둥이 동생이 신작로에 교통량이 많은 장날, 장에 가신 어머니를 마중 나간다면서 내 자전거를 타고 나가다 삼거리에서 경운기에 치였다. 마침 집에 오던 어머니는 그 현장을 목격하셨다. 막둥이 죽었다는 어머니의 절규를 듣고 달려 나가니 내 자전거는 두 동강 나서 길가에 뒹굴고 있었고 동생은 길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너무 슬퍼 절규하듯 엉엉 울었다. 다행히 막둥이는 크게 안 다쳤다. 집에 온 어머니는 화가 나서 나를 크게 혼내셨다. “너는 다친 동생 돌볼 생각은 안 하고, 부서진 자전거 조각 붙들고 그렇게 엉엉 우냐? 자전거 부서진 게 그렇게 슬프더냐?” 억울한 일이었다. 다친 동생에게는 동네 사람들이 우루 몰려 있었지만 내 자전거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는데….
‘굿 라이프’의 최인철 교수 말이 맞다. “희열의 상태는 장기간 지속되지 않는다”. 박살 난 자전거는 최고의 희열(행복)을 다시 ‘항상성’ 선상으로 되돌려 놓은 사건이었다. 자전거는 고쳐졌고 나는 다시 ‘항상성’을 회복했다. 겨울 철에는 사랑방 아궁이 앞에서 쇠죽을 쒀서, 여름철에는 꼴을 베서 어미 소에게 주면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소박하게 어린 시절의 행복을 느꼈다.
차츰 난 방랑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고 그 준비를 열심히 하기로 했다. 우선 나는 내가 태어난 이곳을 벗어나 대처(大處)로 가고 싶었다. 내 고향 밖, 외부 세계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당시 우리 중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즐겨 읽은 책은 김찬삼 교수의 ‘세계 여행기 시리즈’였다. 1950년대부터 무전여행으로 전 세계를 누빈 그는 현대판 김 삿갓이었고 나의 롤 모델이었다. 내 작전은 먼저 아버지의 나에 대한 기대를 그 이상으로 만족해드려 행복하게 만들고 그런 아버지를 졸라 대처로 나가서 공부하고 방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미 자전거도 그런 식으로 받았으니까.
아버지의 꿈은 내가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겨울 방학, 할 일 없이 빈둥대는 나를 아버지가 불러 안방에 앉히셨다. 아랫줄에 다섯 개의 나무 알, 윗줄에는 한 알, 흔들면 알들이 뻐걱뻐걱 움직이는 때 묻은 대나무 주판을 방바닥에 놓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주판을 안다. 아버지가 구장(里長을 그렇게 불렀다)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의 비료 값과 공출한 벼의 매상 금액 등을 계산하던 도구였다. 학교 앞 점방 안 주인이 돋보기를 끼고 손가락으로 천천히 주판알을 움직이던 것을 보았다.
처음에 아버지는 1부터 10까지 더하는 법을 주고 그것을 바로 실연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하지 못하니 화가 난 아버지는 내 박박 머리에 주판으로 쓰윽 톱질을 하셨는데 순간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떨어졌다. 그렇게 시작한 주산 공부였는 데 곧 읍내에서 열리는 학술 경연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서 상도 타 왔다. 아버지는 너무 좋아하시더니 국민학교 5학년이 되자 십리 떨어진 읍내 주산학원에 보내셨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신작로 자갈길을 걸어 매일 읍내로 다녔다. 주산 학원장 선생은 키가 작은 척추 장애인이었으나, 호산(呼算) 시간에 “이백칠십팔 원이야, 팔백육십오 원이야, 팔천구백칠십 원이야 ~~~”라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늘 힘 있고 낭랑했다. 그의 굽은 등은 훌륭한 울림통 같았다.
그의 목소리에 맞추어 경쾌하게 움직이는 수십 명의 학원생이 주판알 튕기는 소리는 한 편의 작은 오케스트라였다. 학원비는 월 500원이었다. 당시 월사금이 200원 정도였으니 아버지는 꽤 큰돈을 나에게 투자하신 것이었다. 월사금은 담임선생과 학부모 그리고 학생에게 너무나도 큰 스트레스였다. 담임선생은 매일 종례 시간에 월사금 가져오라고 독려하셨고, 교감 선생의 닦달에 못 이겨 좀 비열한 납부 독촉 책을 썼다. 그날 월사금을 낸 학생에게만 미국에서 식량 원조로 온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 온 쪽을 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 반 60명 모두에게 한 개씩 나눠 줄 정도의 양이 안 돼서 주먹 만한 빵을 선생님이 반이나 3분의 1씩 쪼개서 나누어 주던 때였다.
아버지의 목표는 내가 빨리 승단(昇段)을 하여 읍내의 상고(商高)를 졸업하자마자 농협이나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나는 열심히 가감산, 승산, 제산, 암산, 전표산을 연습하며 초등학교 5학년 때 주산 1단에 들어갔다. 그 덕분에 지금도 두 자릿수 숫자의 더하기는 암산으로 계산기 누르는 것보다는 빨리 할 수 있다. 자전거를 받은 뒤 내 작전은 공부를 계속 잘해 아버지가 읍내 상고가 아닌 다른 곳으로 나를 진학시킬 마음을 가지시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중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오전엔 입학식이 있었고, 오후에는 우수반과 보통반을 가르기 위한 학력 평가 시험이 예정되어 있어서 우리 동네 친구 서너 명과 그 부친들이 한 식당에 갔다. 어른들이 막걸리 한 대접 씩 마시니 음식점 주인이 장난으로 우리들에게 가락국수 그릇에 막걸리를 가득 따라 주었는데, 나는 집에서 아버지와 막걸리를 반주로 조금씩 먹던 습관이 있었으므로 거침없이 다 마셔 버렸다. 점심은 술에 취해서 못 먹고 시험장으로 갔다. 비몽사몽간에 알딸딸한 상태로 시험을 보았고, 그 결과는 6 학급 중 전교 2등! 남들은 하나도 안 마신 막걸리를 가락국수 대접에 마시고 치른 시험 결과가 이 정도면 아버지께서 상고(商高)에 거시는 기대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전교 1, 2등의 통지표에 목도장 찍는 아버지의 흡족한 표정을 보면 나도 행복했다.
부모님은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모 심고, 보리 베고, 벼 바슴(타작) 하는 바쁜 농번기의 반 굉일(토요일)과 굉일(휴일 또는 일요일)에 농사일을 도와주길 바랬지만 나는 시험공부를 핑계로 학교로 갔다. 학급 석차와 학년 석차가 표시되는 통지표는 어느새 나의 파랑새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