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은 나에게는 자유를 의미했다. 어차피 죽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면 집에서 나와 가족,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 보자. 청소년기 즉 심리적 ‘주변인’ 시절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꿈도 하나의 파랑새이다. 꿈이 있으면 그것을 준비하고 추구하는 기간도 행복하다. 나는 계속 방랑의 꿈을 키우며 범생이로서 중학교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는 또 그렇게 행복할 수 있었다.
최인철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우연히 찾아오는(幸) 복(福)”이라 한다. 우연과 복이 행복의 두 가지 요건이라는 점인데, 영어 “Happiness”도 우연이 일어나는 일, Happening의 Hap에서 기원하니 동서양이 모두 행복의 우연성을 공감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운명론이 지배하던 신분 사회가 붕괴되었고 개인의 적극적인 의지와 자신감으로 운명을 개척해 가며 살아가는 시대에서 행복을 그저 우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알고 기다릴 수만은 없다. 심리학자로서 최 교수의 깊은 성찰과 연구 결과를 담은 책 ‘굿 라이프’ 전반부를 나는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했는데 이는 그동안 내가 조각조각 단발적으로 듣던 행복론을 한 번에 명쾌하게 정리해 준다.
“우리 평범한 일상 속에 깃들여진 우연한 행복의 발견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가 행복이다”. “행복한 상태는 고통의 완전한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정적 감정보다 긍정적 감정이 더 많은 때를 행복한 상태라고 말한다”.
이 두 문장으로 지속되지 않는 행복이라도 우리는 파랑새를 끊임없이 찾아 나서야 한다는 어릴 적의 생각에 대해 든든한 명분을 얻었다. 송아지가 있든 없든 어미 소를 식구처럼 대해주는 일상 속의 행복, 자전거는 박살 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를 얻기 위해 공부 1, 2등은 해 볼만하다는 것, 내가 동경하는 방랑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만하다 것, 등등…. 이렇게 심리학 교수의 이론은 내가 어릴 적 생각했던 것들을 다 맞은 것으로 채점하는 마력이 있었다. 최교수의 이 글은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의 편린들이 한 때 우울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밀어 내고 나의 어린 시절이 전부 행복했던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사람마다 각각 주장하는 행복의 정의와 요건이 다르지만, 나는 그 책에 많이 동감하였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 책에서 명확히 언급 안 한 것이 있었기에 맘 속에는 무언가 풀리지 않은 의문 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그 의문은 곧 정리되었다. 동글이는 행복하게 나와 같이 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코뚜레를 낀 다음부터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우시장으로 팔려 나가 행복은 끝났다. 그렀다면 자유가 행복의 전제 조건이 아닐까? 자유는 모두가 당연히 가진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완벽한 행복은 누리지 못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상태에서도 행복이라는 허상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행복은 늘 고점과 하점을 오가는 사이클을 그리게 되는데 그 사이클의 추진 동력은 최교수가 말하는 ‘항상성으로의 수렴’이 아닐까?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하고 싶은 일들을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행복이 진정한 것이 아닐까? 그 행복은 항상성으로 복귀하는 시간이 아주 길거나 또는 그 사이클 자체가 아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려면 진정한 자유가 선결 조건일 것이다. 동글이가 코뚜레만 없었다면 그는 계속 자유로운 상태에서 행복을 누렸을 것이니까. 어차피 모든 열광적인 일도 결국 시들 해질 것이지만 그때마다 행복을 느끼되, 그 행복이 ‘항상성의 수렴점’에 도달하여 밋밋해질 즈음에는 다시 새로운 행복을 일상에서 충전하는 것, 그게 행복한 삶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절대적 자유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
절대적 자유? 그것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