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주(四柱)를 보면 기록을 꼼꼼히 잘하는 성격이라고 나온다. 나의 고등학교 3년 동안(1976년 3월~1978년 12월) 조그만 잡기장에 줄을 그어 금전 출납부를 만들었다. 졸업할 때 집계해 보니 총지출액이 100만 원이 조금 못 되는 99만 얼마였다. 물론 3년 동안의 하숙비가 그 지출의 대부분이었지만, 그 당시 도화지 한 장, 백노지 한 묶음 등 세세한 지출 항목을 모두 기록했었는데 아쉽게도 역마살 인생이라 이리저리 이사 다니는 통에 분실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귀중한 기록을 분실한 게 너무나도 애석하고 안타깝다.
종이의 기록은 아니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오랫동안 간직하고픈 어릴 적의 빛바랜 기록, 또는 곧 끊어질 것 같은 비가 죽죽 흐르는 아날로그 필름에 아슬아슬하게 담겨있는 영상 기억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기록 내지 기억들도 이순(耳順)을 앞둔 오래된 용기(容器) 속에 담겨 있으니 시간이 갈수록 자꾸 Fade out 되어 곧 삭제될 것 같다. 그래서 내 뇌간에 아무렇게도 방치되어 산재된 이 아날로그 메모리 칩들도 차근차근 모아서 지워지지 않도록 디지털화 해 놓고 싶다. 그중에서도 군대 가기 전까지 하루하루의 꼬뚜레처럼 나를 늘 구속하던 ‘변또’에 대해서 기억을 정리해 놔서 더 이상 그 기억이 뇌리에서 세월이 흐름에 따라 '기억하고 싶은 대로' 변형되지 않도록 기록해 놓고 싶다.
1967년 5월 초였을 것이다. 학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가는 봄 소풍이었다. 못자리 만들고 파종해야 하는 농번기의 바쁜 아침에 첫 소풍의 설렘을 못 이겨 부엌 주변을 서성거리며 재촉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네모나게 두툼하고 찌그러진 누런 양은 도시락통을 주셨다. 그때는 일제의 잔재가 남어 있어서인지 몰라도 우리는 그냥 '변또'라고 불렀고 그것이 우리말인 줄 알았다. 나는 책보를 마루에 펴고 변또를 대각선 중앙에 놓고 둘둘 만 다음, 책보자기 양끝을 한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둘러 매고, 배 앞에서 양끝을 당겨 매듭 묶고 학교로 달려 나갔다.
변또(사진출처: Naver 이미지)
운동장에 모여서 보니 1학년 첫 봄 소풍이라고 몇몇 학부모와 할머니들이 따라오셨다. 할머니들은 소풍 가는 것을 ‘원적 간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안 쓰이는 말이라서 그런지 ‘원적’은 네이버(Naver) 어학 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이다. 굳이 한자로 쓴다면 멀리 발자취를 남긴다라는 뜻에서 ‘遠跡(원적)’이 되지 않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아니면 원족(멀 遠 자에 발 足 자)을 충청도 할머니들이 원적이라 발음한 것 같기도 하다.
한 십 리쯤 걸어가 작은 동산 소나무 숲에 모여 앉아 노래도 부르고 보물 찾기도 했다. 소나무 밑동이나 바위틈에 끼어진 조그만 종이쪽지를 찾아 헤매는 동안 어깨에 맨 변또가 거추장스러웠다. 할머니나 부모님이 따라온 애들은 변또 걱정 없이 재빠르게 뛰어다니니 보물 쪽지를 많이 찾아냈지만 난 하나로 찾지 못해 속이 상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반장 엄마가 싸 온 담임 여선생님 변또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다. 다들 한석봉 어머니가 썰어 넣은 듯한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정돈된 김밥이었다. 내 것도 그러려니 하고 변또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이 무슨 해괴한 모습이던가? 가지런한 떡국 모양의 김 밥이 아니라 썰지 않은 길쭉한 통 김밥이 세 줄이나 그대로 들어 있었고 그 옆의 노란 무 하나도 통째로 나란히 누워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나는 어머니가 바빠서 김 밥과 단무지를 썰어 넣는 것을 잊어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만 다른 모양의 김밥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하여 그 자리에 앉아 먹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남들은 다 나무젓가락으로 김 밥을 하나하나 집어 먹는데 내 변또에는 나무젓가락은 고사하고 당시 집에서 쓰던 놋쇠 젓가락도 없었다. 슬그머니 변또 뚜껑을 닫고 일어나 아무도 없는 소나무 그늘 아래로 갔다. 배는 고팠으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다시 변또를 열고 김밥 한 줄을 손에 잡고 배어 먹기 시작했다. 김 밥 두 입 먹고 변또 뚜껑에 놓은 다음 노란 무를 집어 들고 한 입 와자 끈 베어 먹고…. 그때 같은 반 친구 한 녀석이 멋쩍게 씩 웃으며 다가왔다. 별로 친하게 지내던 애도 아니라서 난 순간 경계심에 책보로 변또를 덮었는데 그 친구는 내 옆에 앉아 변또를 열었다. 같은 통 김밥에 통 무였다. 우린 동병상련의 깊은 동질감을 느끼며 말없이 그러나 창피한 마음만은 떨쳐 버리고 편안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날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불평하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통으로 먹는 것이 더 맛있는 거라 대답하시며 별로 신경을 안 쓰셨다. 나중에 김 밥 마는 것을 보니 그때 우리 집에는 김밥용 발이 없었던 것이 그 통 김밥의 이유였다고 추측된다. 김 밥은 발을 가지고 힘을 꽉 줘서 단단하게 말아야 옆구리가 안 터지고 잘 썰어지는 게 아니던가?
초등학교는 내 집 바로 앞에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점심 후에도 수업을 해야 하니 도시락을 싸 오라고 담임선생임이 엄명하셨지만 난 찬 밥 먹는 것이 싫어서 도시락을 안 싸가지고 갔다. 우리 집 소도 따뜻한 밥을 먹는데 사람인 내가 왜 찬밥을 먹어야지? 혼식을 강요하는 시대였으니 점심시간에 담임 선생님도 교실에서 같이 도시락을 까 드셨다. 우리 급우들은 그렇게 나라에서 강요 안 해도 자연 보리가 반이 넘는 도시락을 싸 올 수밖에 없는 그 시절의 그 형편이었다.
일부 친구는 통치미 하나를 반찬이라고 변또 속에 싸왔다. 그것은 동치미 바탱이(항아리)에서 허옇게 뜬 발효 물질을 뒤집어쓴 무 하나를 자르지 않고 통째로 보리밥 위에 푹 찔러 얹혀 온 것이다. 그는 한 손으로 그 통 무를 와그작 와그작 베어 먹으며 변또를 잘도 비웠다. 그렇게 다들 점심 먹는 동안에도 나는 꿈쩍없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변또 뚜껑에 십시일반으로 보리밥을 모아 갖다 주었지만 나는 거부하고 안 먹었다. 이런 상황이 며칠 가자 선생님은 나만 특별히 점심시간에 집에 가서 밥 먹고 오는 것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다. 단식 투쟁의 승리였다.
중학교는 십 리 밖 읍내에 있었고 나는 걸어서 통학했다. 중학교 1학년 3월부터 도시락 먹는 일이 제일 힘겨웠다. 3월이라 날씨는 아직 쌀쌀하였고 차디 찬 변또를 까먹는 것은 나에게는 고역이고 꼬뚜레였다. 입이 짧은 나는 찬 밥을 삼키는 게 너무나 힘들어서 먹는 속도가 엄청 늦었다. 다른 친구들이 도시락 다 먹고 교실 밖으로 놀러 나갈 때쯤이면 나는 겨우 반 정도 먹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도시락을 반쯤 남기고 집에 가져왔다. 집에서 도시락 싸 준 누나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나중에는 남은 밥을 하교 길에 있는 우리 논에 버리고 왔다. 우리 논에 거름이라도 되게 할 요량으로 남의 논에는 버리지 않았다.
내가 찬 밥을 잘 먹지 못했던 주된 이유는 도시락 반찬이 내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변또 내에 있는 조그만 반찬 통에는 거의 매일 도라지 나물이나 마늘 쫑 또는 깍두기로 채워졌다. 교과서 3권을 합한 정도로 크고 두꺼운 양은 변또는 책가방에 세로로 세워 넣어서 들고 등교해야 했다. 변또의 한 부속품인 반찬 통에는 따로 뚜껑이 없었기 때문에 변또는 항상 반찬 용기 쪽이 위로 가게 신경 써야 했다. 만일 실수로 그 부분이 아래로 가면 가방에 깍두기 국물이나 마늘 쫑 물이 흘러나와 가방도 책도 다 냄새나게 배어 들었다.
1학년 중간고사 성적이 발표된 후 읍내에서 가장 잘 사는 집의 아들이 내 짝이 되었다. 그 친구는 간질을 앓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정상이지만 가끔 간질이 발작되면 입에 거품을 물고 교실 바닥에 누웠다. 그런 그를 친구들이 놀려대고 무시했다. 속 상한 그의 부모는 담임선생에게 부탁하여 가장 얌전한 범생이와 같이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의 짝꿍이 되어 나도 그의 덕을 봤다. 그는 당시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보온 도시락과 별도로 된 푸짐한 반찬 통을 따로 들고 등교했다. 그의 반찬은 계란 프라이, 어묵 그리고 소시지가 주종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같이 먹으면서 나도 내 도시락을 다 비울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간질병 때문에 휴학했다.
그 후 새로운 베프(Best friend)가 생겼다. 입이 얼마나 큰지 웃으면 입 가장자리가 귀에 걸리는 그는 바닷가에 사는 가난한 어부의 아들이었다. 그의 변또 반찬은 항상 변함없이 그 지방 특산물 새우젓이었다. 그는 나보다 키가 커서 두 세줄 내 뒤에 앉았지만 점심시간이 되면 변또를 들고 내 자리로 와서 서서 같이 먹었다.
그와 나는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이기도 했지만, 새우젓에 질린 그는 내 반찬이 먹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의리상 그의 새우젓도 집어 먹어야 했다. 엄청 짜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파리 만한 새우 한 마리씩 살짝살짝 건져 먹어야 했었다. 지금은 김치 담글 때나 돼지고기 수육을 먹을 때 먹는 광천 특산물 양념이지만 그때 변또 반찬으로 새우젓을 싸온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가난의 소치였다. 당시 반찬의 기능은 싱거운 맨 밥을 먹기 위한 짠맛에 있었다. 그래서 당시 서민층은 반찬을 짜다는 의미의 ‘건건이’라 불렀다.
중3이 되었다. 우리 동기는 전체 6 학급이었는데 그중 한 학급은 우수 반이라 하여 전교 60등 이내에 드는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때 P가 내 베프가 되었다. 그는 읍내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하교 길에 가끔 내 자전거를 같이 타고 우리 집까지 오고 나머지 20리 길은 걸어서 갔다. 그는 나와 같이 전교 1등을 한 적도 있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상태였다. 나는 그때도 가끔 변또를 다 못 비우고 남은 밥은 논에 버리곤 했었다. 점심시간에 내 변또를 비우는 데 그가 도와주는 우정도 발휘했다.
매일 같이 내 도시락 먹는 게 주변의 눈 때문에 자존심 상한 그는 어느 날 매점에 가서 빵을 사 먹는다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매점에 가는 것이 아니라 수도가로 가서 물로 배를 채우고 온다는 사실을. 항상 기운이 없어 자근자근 속삭이듯 얘기하던 그는 착하고 순수했다. 나는 동성연애하듯 그의 마른 손을 잡고 걷는 게 좋았지만, 눈만 휑한 그의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가시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으로 그와 헤어진 후 40년 만에 SNS 덕분에 그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 설레는 맘으로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방 도시에서 영어 학원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중학교 졸업 후 온갖 고생 후 방통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영어 학원을 한다고 했다. 과연 똑똑한 친구였다. 서로의 지나온 길을 확인하여 궁금증을 푼 후 우린 서로 ‘언제 한 번 만나자’라는 의례적인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가슴속에 있는 서로의 좋은 추억을 길이 보전하는 데에는 안 만나는 것도 그 한 방안이라는 것을 지나온 인생에서 터득하지 못할 만큼 우린 아둔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고(故)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라는 수필을 읽었고, 어느 방송국에서 아끼꼬를 수소문해서 찾아 대기시켜 놓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생 방송을 통한 극적인 상봉을 유도했지만 피천득 선생이 거부했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기에….
1976년 충청도 G시에 있는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변또 들고 등교하는 번거로움도 찬 밥 먹어야 하는 고역도 사라졌다. 점심시간에는 하숙집으로 쪼르륵 달려가서 따뜻한 밥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었으니 너무나도 행복했다. 식욕도 돋고 밥 먹는 속도도 변또 밥보다 훨씬 빨랐다. 그러나 이 행복도 얼마 못 가 몇 달 만에 끝났고, 전국적인 쌀 부족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혼, 분식이 거의 강제적으로 실시되면서 다시 변또를 싸가지고 등교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변또가 다시 코뚜레로 복귀하였다.
다만 변또가 아니라 도시락이 되었다. 교과서 3권 두께의 두툼한 변또가 아니라, 면적은 A4 사이즈로 커졌지만 두께가 책 한 권 정도로 얇아진 날렵한 모양에, 반찬 통은 밀폐 형으로 별도로 있어 반찬 국물이 흘러나오는 일은 없게 되었다. 점심시간에 돋보기안경 쓴 교감 선생님이 각 반을 돌면서 직접 도시락 검사를 하셨다.
그때 도시락 반찬을 보면 각각 하숙집의 정성과 맛을 비교할 수 있었다. 쌀로 하숙비를 냈는데 보리밥을 먹어야 하는 게 하숙생인 나의 입장에서는 억울했다. 하숙집 주인 입장에서는 하숙생이 집에 와서 점심 먹고 가는 것보다 각 하숙생들에게 도시락을 싸 주는 것이 노동 측면에서 번거롭기도 했고 경제적으로도 손해였다. 어묵, 계란, 김, 생선 그리고 보리 등 하숙집의 주, 부식 지출이 커졌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하숙생에게 전가되었다. 때마침 정부의 요구로 실시되는 반상회는 하숙집 아줌마들이 모여 하숙비 인상에 대해 담합하는 좋은 자리가 되었다. 그들은 반상회에서 기존의 쌀 6말 집, 7말 집, 8말 집이라 등급과 매달 하숙비를 쌀로 받거나 쌀값에 연동되는 기존의 관행을 없애고 정액의 현찰 하숙비를 받기로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그 후 하숙생들은 도시락 반찬이 점점 부실화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나의 이런 고통은 근원적으로는 정부가 안겨 준 것이었다. 혼, 분식 강요만 없었더라면 고등학교 3년 동안 무거운 책가방에 도시락까지 끼어 가지고 다녀야 했던 고통은 없었을 텐데….
고 2 때에 기거했던 하숙집의 주인어른은 병이 심해 휴직하고 치료 중이었다. 하숙생이 3명이었는데 반찬이 싱겁고 맛이 없고 채식 위주였다. 입이 짧은 나는 영양실조 수준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 하숙집 형편을 보고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반찬 개선을 요구하지는 못하고 간접적인 항의를 했다. 하숙집 주인하고 아침저녁을 같이 먹으므로 반찬은 손도 안 대고 바로 찬물에 밥만 말아먹었다. 무언의 항의였지만 하숙집 아줌마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셨고 개선은 전혀 되지 않았다.
두 번째 항의는 내 방 밖에 있는 멍멍이를 이용하였다. 시끄러워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멍멍이에게 재갈을 물리고 고무줄로 꽁꽁 입을 묶어 버렸다. 이 정도면 하숙집 아줌마가 눈치채고 반찬이 좀 개선될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결과는 뜻 밖이었다. 어느 날 하교하여 하숙집에 들어가니 고깃국 냄새가 구수하게 났다. 주인집 아줌마는 사람을 시켜 근처 야산의 나무에 그 개를 매달아 잡아 수육을 만들었던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반찬 싸움에 멍멍이만 희생되었다.
대학에 갔다. 용돈이 충분하지 못한 나에게 매일 라면이나 구내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것은 언감생심 사치였다. 당시 남자 대학생 가방은 도시락을 담고 다니기에는 좀 불편한 구조였다. 가방 위에서 아가리 형식으로 좌우로 펼쳐 열고 그 위에 손잡이가 달린 것이었는데, 도시락과 유리 반찬 병을 넣고 나면 책이 몇 권 못 들어갔다. 근본적으로 대학생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디자인된 가방이었다. 봄에는 아직 날씨가 쌀쌀해 학생 식당에서 차디찬 도시락 밥을 까먹는 게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몇십 원 했던 가락국수 국물만 사서 거기에 찬 밥을 풀어 넣어 먹는 방법을 썼다.
2학년 때부터는 본격적인 고시 공부를 한다고 형수에게 도시락 두 개(점심과 저녁)를 싸 달라고 했다.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도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이 되면 신촌 철다리 밑의 분식집이나 한식집에서 밥을 사 먹고 들어 오는 친구들의 입에서 풍기는 냄새가 한없이 부러웠다. 도시락은 두 개였지만 반찬은 늘 김치 유리병 하나였다.
억지로 찬 도시락 밥을 먹은 후에는 곧바로 식당 옆 벤치에 앉아 거북선이나 태양 또는 솔 등 당시 최고급 불쏘시개(담배)로 불을 지펴야만 속이 좀 따뜻해지고 소화가 되는 것 같았다. 아궁이에 불 때듯이…. 담배 한 갑으로 일주일을 버텨야 용돈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한 갑에 20개비이니 하루에 3까치로 제한할 수밖에 없었고 식후에만 한 까치씩 피웠다. 담배의 효용은 식사 직후가 최고로 높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떨어지니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식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꼭 담배가 당기는 때에는 담배를 가방에 감추어 놓고 나가,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담배 피우고 있는 친구에게 빈대 붙을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이나 일, 공휴일에는 식당이 안 열어 도시락 먹을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시락을 두 개씩 가지고 도서관에 나왔다. 점심시간이 되면 혼자 캠퍼스 숲 속에 들어가 가방을 식탁 삼아 도시락을 까먹었다. 하루는 젓가락을 안 가지고 와서 나뭇가지를 꺾어 도시락을 먹었던 쓸쓸한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신촌 사거리에서 자취하는 친구가 생겼다. 그는 형제들과 방 하나를 얻어 자취하는데 그의 큰 어머니께서 오셔서 밥을 해 주시고 있었다.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그 친구 덕분에 토, 일요일에 찬 도시락을 혼자 쓸쓸히 먹는 외로움과 처량함은 면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에 그 친구 집에 가면 큰 어머니께서 내 도시락 밥을 비우시고 대신 따뜻한 밥과 반찬을 내주셨다.
내 딸들은 전혀 이해 못할 격세지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이지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한국의 각 학교에서 급식을 해주니 이 얼마나 좋은 복지 국가인가? 통 김밥도 통 동치미도 반찬 국물 흐르는 변또도 걱정할 필요 없는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 아닌가? 내가 근무했던 미국의 자동차 공장에 다니는 생산직 근로자의 절반 이상은 구내식당에서 점심 사 먹는 돈이 아까워 아직도 도시락을 싸온다. 인도에서 공장을 지을 때 근로자에게는 무제한으로 공짜 밥을 제공할 수 있도록 식당 레이 아웃을 설계했다.
이제 밥 먹는 것이 더 이상 나의 꼬뚜레는 아니다. 단체 급식이든 외식 산업이든 먹는 것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선진국이다. 값싸고 신속하고 맛있고. 이 모든 게 변또로 인한 고생을 맛 본 뒤의 달콤함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