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화를 포기하겠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스무 살 초반까지 선택적 함구증을 겪었다.
내겐 선천적으로 작은 신체적 문제가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니 그것은 드러난 약점, 어떤 먹잇감이 되었다. 아이들의 눈과 강약 판단은 생각보다 예리하며, 공격하는 수단과 방법 또한 굉장히 치밀하다. 내게 학교는 결코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등굣길마다 이명과 현기증에 시달렸지만 너무 어린 나이었으니 그 증상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아침밥을 안 먹어서 기운이 없나보다 했었다.
교실에 들어서면 숨이 턱, 막히고 혀와 목구멍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2001년의 어느 봄날, 그 날 이후 나는 쭉 학교라는 공간에서 마음을 스스로 닫아 버렸다. 누구와도 짧은 얘기조차 하지 않았으며, 고갯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선택적 함구증이 온 것이다. 국어책을 읽어야 할 때나 발표를 해야 할 때는 말 그대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내 학급 번호가 15번이면 5일, 15일, 25일은 불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 번호가 지목되고, 발언을 해야 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 기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우습게도 10살 이전까진 아이들과 말을 곧잘 했다. (물론 내 결함에 대한 놀림은 늘 받았지만 거기에 첨예한 공격성은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게도 내겐 친구가 단 한 명 남아 있다. 8 살배기 때 만난 친구다. 나란 사람의 모든 결함(신체적인 것을 떠나서)을 전부 알면서도 내 곁에 지금까지 남아 줘서 고마울 뿐이다. 이 친구와의 교류가 내겐 유일한 세상과의 교류였다.
집과 가족도 결코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다.
아버지. 아, 정말 파란만장 하셨다. 술을 전혀 먹지 않아도 굉장한 분노를 말과 행동으로 내비칠 수 있는 사람.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 첫 번째 인물이시다. 나는 가족신문 숙제가 참 싫었다. ‘아버지는 엄하시지만 자상하시다.’ 라는 스스로가 적고도 의아하고 의미 없는 문장. 아버지는 어머니를 향한 일방적인 폭언이 심했으며, 그 작은 빌라에 경찰도 자주 들락거렸다. 가정 폭력. 이것은 현재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가 안고 살아야 하는 매서운 추억이다.
엄마, 엄마는 어머니보단 엄마가 어울린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고 실직 생활을 연달아 할 동안 엄마는 끊임없이, 꾸준히 일했다. 가사 노동과 아이 셋의 육아를 완벽하게 도맡은 것은 물론, 그 와중에 부업거리와 일자리를 병행하다가 한 회사에 들어가서 직급을 달고 13년째 일하고 계신다. 엄마는 대게 친근하고 다정했다. 하지만 항상 아버지 문제와 직장 일에 치여 살았기 때문에 나의 속이 멍든 이야기와 함구증에 대해 섣불리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속들이 곯은 채 암묵적으로 유지되다가 내가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비로소 뿔뿔이 흩어졌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왔어야 했을까? 나는 한국의 가족 구조과 가정 폭력에 대한 책들을 잡히는 대로 읽었다. 결론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하나였다. ‘가부장제.’ 엄마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선택한 것도, 당시 원치 않았던 첫 아이를 없애지 못한 것도, 우리 가족이 그렇게 갈등을 겪으면서 이혼을 성사하지 못한 것도, 한국의 ‘정상 가족’, 그리고 가족주의라는 굴레와 지독한 가부장제 때문이었다는 것. 아버지 역시 당신의 어린 시절이 할아버지로 인해 험난했으니 가부장제의 피해자다. 그래, 상처를 받은 사람만이 상처를 줄 수 있다.
현재 우리 가족 네 명은 한 지역 내에서 각자 한 집에 따로 산다. 차로 10~20분 정도 거리를 두고. 주거 비용을 각자 지불하더라도, 과거의 상처들을 승화시키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같은 공간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 연륜이 쌓인 아주 먼 훗날은 또 모르겠지만.
1인 가구도 이제 어엿한 사회의 구성 단위이다. ‘부모와 아이’ 로 이루어진 ‘정상가족’ 을 강요할 시기는 한참 지났다. ‘정상 가족’ 에 대한 압박과 강요가 어떤 가정을 만들어 내는지 나는 온 몸으로 경험했다. 행복하진 못하더라도 일단 사람이 온전하게 살기 위해서는 집이 편안해야 한다. 지금도 위험한 집 안에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분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나는 먼저 그곳에서 나오라고 말하고 싶다. 가정 폭력 상담 센터에 연락해서 어떻게든 지원을 받거나, 단기 일용직 아르바이트로 40만원 정도만 벌어서 근처 고시원 월세로 들어가는 등 방법은 있다. 일단 숨이 트여야 생각이 열린다. 용기 내서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하고, 더 이상 누가 나를 해하지 않는 나만의 장소에서 실컷 울고, 종이에 자신에 대한 키워드나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적어 보면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다.
선택적 함구증 경력 8년의 대학 입학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성적에 대한 질타를 받기 시작했다. 곧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동네 학원에 교습을 다니게 되었다. 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원했지만 아버지의 결사반대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내 의견이 단칼에 묵살되는 짜릿한 경험! 그리고 대입에 대한 압박과 고행이 시작된다. 당시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요 철칙이었으니, 아버지가 기준으로 세워 놓은 몇 개의 대학과 학과를 위해 공부했다. 나름 그림에는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디자인과를 1지망으로 두고 입시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섬유와 패턴, 옷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교 입시 원서를 쓰던 날, 패션디자인과와 글로벌 미디어학과, 섬유디자인과를 써서 접수했다. 집에 가니 아버지가 난리가 났다. 그 전공으로 밥 벌어먹기 힘들다. S기업 안 가고 싶냐. (엥? 저는 그럴 생각이 없는데요.) 결국 나는 원서를 시각디자인과로 전부 교체했다. 다행히 지원한 대학들 중 제일 입결이 높은 대학에 한 번에 합격했다. 나는 아버지가 인정해주시니 마냥 뛸 듯이 기뻤다. 함구증을 고치지도 못한 상태에서 대학 생활에 대한 로드맵과 진중한 고민은 전혀 없는 채로.
대학교 새내기는 자기소개, 자기소개의 연속이다. 정말 지겹도록 해야 한다. 강의실 앞에 나가 더듬거리는 목을 가다듬고 진솔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000입니다. 제가 남들 앞에서 말을 잘 못하니까 이해해 주세요.’ 라는 말을 서두로, 힘겹게 40명의 눈을 마주쳐가며 나름 소개를 마치고 내려왔는데,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비수였다! “여러분, 아픈 친구는 서로 도와 가며 지내야 해요.”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 내가 아파보이나? 아픈 친구? 무슨 의도로 하신 말씀일까? 난 지금부터 ‘아픈 친구’로 기억되려나? 기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교수님께 별다른 항변은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교수님의 그 말이 나의 대학 생활 부적응에 한 몫 했다. 감사합니다.
시각 디자인과는 학과 특성상 발표 수업이 거의 매주 있다. 서로의 디자인 발상 과정과 래퍼런스, 아이디어 스케치, 발전 과정을 깔끔한 PPT로 만들어서 설명과 함께 공유하며 피드백을 나누는 게 수업 자체다. ‘아픈 친구’ 가 되어 버린 나는 함구증이 다시 도졌다. 그나마 같이 다니던 동기 두 명과도 서먹해졌다. 아마 내가 먼저 선을 그었을 것이다. 발표가 너무 싫어서, 남들 앞에 나가서 내 엉성한 목소리로 강의실을 채우는 게 너무나도 싫어서, PPT 대신 밤을 새워 영상을 만들어 간 적도 있다.
발표 문제도 그렇지만 학과에서 다루는 내용도 내겐 썩 맞지 않았다. 상업적인 시장 경쟁과 평가를 떠나서 솔직한 나의 생각과 표현 기법을 드러내는 것, 팔려야 하는 제품이 아니라 소수의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는 작업물에 더 주력하고 싶었다. 물론 재료는 한정적이었다. 당시엔 아이패드도 없었고, 아크릴 물감 한 세트를 갖추기에도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여건이었다. 이런 환경이 오히려 내게 자극을 주었던 것일까? 항상 주어진 틀을 깨는 것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마구 찢어 붙여 놓은 콜라주, 벽에 되는대로 칠하는 그래피티 아트, 글쇠들을 모아 붙인 조잡한 랜섬노트, 이런 그래픽 요소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허나 대학 수업에서 요구하는 것은 대게 논리와 설득을 중심으로 한 상업적인 디자인 프로젝트였다. 매 수업이 극심한 부담이었고, 대학 생활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결국 2학년 1학기는 학사 경고로 대차게 말아먹고 다음 학기부터 휴학계를 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