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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기 Oct 04. 2021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너의 우주에 닿고 싶어

A는 B에게 책을 빌렸다. B는 책을 여러번 읽어서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며 예의어린 빈 말을 했다. A는 B가 한 말을 믿고 책을 한쪽 구석에 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B는 어느 날 A에게 책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시간 괜찮으면 차 한 잔 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책만 주고받기 뻘쭘해서였다. A는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책을 언급하며 차 한 잔을 제안한 건 나와 놀고 싶어서일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오해한 채 차를 마셨다. 


똑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 따라 다르게 생각한다. 상황을 곡해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도 다르다. 어쩌면 시선만 다른 게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세상을 사는 나이테가 굵어질수록 '사람들은 모두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명제가 참인 증거들을 무수히 많이 찾아내게 된다. 오죽하면 '사바사'라는 말도 있겠는가. 고대 동서양에서는 사람을 '소우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서사가 있고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한 철학책에서 읽어냈다. 

'이렇게 맛있는 철학이라니' 라는 책이었는데 '모나드 비빔밥'이라는 코너였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이 '모나드'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모나드는 화학의 원자처럼 더이상 쪼개질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에 대한 개념이다. 

저자는 모든 것이 '모나드'라면 인간도 '모나드'일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 한 명이 한 단위인 것이다. 

지구에 77억 인구가 산다면 77억개의 개별적인 모나드가 있다. 이 모나드들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저자는 마치 비빔밥 속 고유의 재료처럼 개별 인간(모나드)이 어울려서 하나의 세상(비빔밥)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와 관련해 "모든 모나드는 자신의 방식으로 우주를 지각하는 살아있는 거울"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구절이 나왔다고 한다. (이 구절이 유명한 지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이 책을 낭독하면서 음식에 빗댄 철학 이야기를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책에 제시된 여러 음식을 먹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특별한 음식이나 철학 이론이 아니었다. 생활 속에서 직접 겪게 되는 '사람마다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모나드 비빔밥이 제일 기억에 남았다. 

저자가 의도한 건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는 모나드가 지각한 이 책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저자가 살고 있는 세상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다른 까닭이다. 


아마 이 오디오북을 들은 사람들 모두 제각각 다른 생각을 할 것이다. 나에겐 '모나드 비빔밥' 이었지만 누군가는 칸트와 붕어빵이, 또다른 누군가는 공자와 짜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을 것이다. 책이 통째로 기억에 남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을 수도 있다.

지구, 대한민국이라는 동일한 물리적 공간 안에서 수천만의 다른 우주들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다행인 건, 이 다른 '모나드' 우주들 속에 경계가 가끔 옅어지고 마음이 닿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우주들 속에 조그만 공감이나 조그만 협력이라도 피어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기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아름다움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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