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담, 어제는 그쪽이 운이 나빴어.
접수가 마감되자, 우리 모두는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도 최소한 평소의 야근 이상의 시간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온몸의 진이 빠져버린 동료들은 한 잔 하자는 권유를 뿌리친 채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각자에게 마련되어 있는 피난처로 떠나버렸다. 모두가 빠져나가 버린 텅 빈 사무실에서 나는 마지막 불빛의 스위치를 내렸다. 그리고 생각해 보자 더는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거리의 네온사인 빛을 밟으며 <조앙ㆍ마두>로 갔다.
- 그래요, 어제요. 아니죠. 오늘 새벽까지예요.
나는 그러나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일터에서, 그것도 오늘 새벽까지의 기억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어쩐지 지금의 내 나이에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도 그것을 느꼈던지 미소를 담은 농담으로 대신했다. 그녀의 붉은빛이 흐르는 머릿결은 실내의 조명 빛에 어울려 고혹적으로 느껴졌다. 거기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예전처럼 웃음을 띠고 있었다.
- 그런데 알베르, 당신은 궁금하지도 않았나요?
나는 설마 하니 지금 그녀가 나에게 새벽까지 그저 술만 마시며 보내버린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그렇게 보지 말아요. 내가 어린앤가요. 당신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백포도주 두 잔을 따라 그중 한 잔을 내 앞에 놓았다. 나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나를 알베르라고 장난스럽게 부르기 시작한 때가. 아마도 이삼 년은 됐을지 모른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던 것 같다. 나는 취미 삼아 때때로 불어를 번역해보고는 했다. 이 소도시에 발령받은 나를 따라온 중고 엘란트라를 몰고 이 고장의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드라이브하는 것으로 기분을 전환하곤 하던 나는 그것조차 무료해지면 더는 할 것이 없었다. 그러면 세 번의 발령을 받고 지역을 옮길 때마다 따라다녀서 모서리가 다 닮아진 원목침대 위에 나는 벌렁 드러누웠다. 몸을 뒤척일 때면 스프링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는 이 낡은 침대 위에서 두 손을 베개 삼아 누워서 혼자 생각을 하거나, 그것도 귀찮아지면 행복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날처럼 중고 엘란트라의 가속기를 힘껏 밟고 지쳐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벌렁 누웠다. 누워있는데 눈앞으로 베란다 쪽 햇살이 머리맡 유리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반대편 벽면에 또 하나의 유리 창문을 만들어 보였다.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저 앙드레 말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또 한 사람, 쟝 그르니에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 보아도 둘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다만 내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기억 밖으로 튀어나왔던 것 같다. 이유는 그랬다. 내 소지품을 아무렇게나 구겨 담아둔 채 구석에 처박혀 있던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 안에는 불어판 원서들이 있었는데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들의 책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문고본이었다. 아마도 다른 책들보다는 쉽게 손에 잡히는 이 책들을 그저 읽었던 습관에서 이 둘이 기억 밖으로 튀어나왔던 것 같다. 나는 여행용 가방 안에서 이 책들을 찾아냈다.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서 기억도 없을 어떤 날에 무심코 접어 두었던 접힌 쪽을 열었다. 거기에는 읽어보아도 별로 감정이 없는 서투른 내 글씨체가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는 종이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앙드레 말로의 문고본 글을 번역해 보다가 그만두었던지 색깔이 누렇게 바래서 끼워진 채였다. 촘촘히 읽어 내려가다가 나는 다른 종이를 집어서 그 부분을 다시 한번 번역해 보았다. 한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한 페이지를 넘기다가 종내는 꼬박 그날 밤을 종이와 연필과 커피로 지새웠다. 동쪽 창 너머로 보라색으로 밝아오는 새벽을 바라보면서 나는 비로소 번역에도 생존점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 나는 중고 엘란트라 승용차가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할 때면 때때로 불어로 된 책들을 번역하곤 했다. 대개 소설과 비평집을 번역하다가 그게 싫증이 나면 시를 번역해 보고는 했다. 취미에 관한 한 내 불어번역은 취미라고 말하기에는 어색한 것이었지만 조금씩 습관이 되자 그것을 즐기게 되었다. 더는 할 것이 없는 것보다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무료해져서 낡아 닮아빠진 삐걱거리는 고물 침대 위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즐거웠던 것이다. 이러한 취미란 우습게도 습관과도 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 고장의 경계를 넘어 고막이 찢어져라 카스테레오를 틀고는 어디론가 질주했던 그날, 나는 다시 돌아와서는 곧장 <조앙ㆍ마두>로 갔다. 청색모자에 청색 빛 항공 점퍼를 걸치고 들어선 나를 보고는 마담은 미소를 보냈다.
- 나는 미성년자가 들어오는 줄 알았어요. 여전히 질주 중인가 보군요. 당신을 보니까 지구가 넓기는 넓은가 보죠?
나는 바 앞에 앉았다. 그때 청색 빛 항공 점퍼의 팔 부분의 지퍼가 열려있었던지 거기서 작은 책이 떨어졌다. 습관이란 이런 것이다. 습관은 머리와 손을 떠나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습관처럼 번역해 보는 문고본 책, 그게 마담의 손 앞으로 떨어졌고 나는 그저 연거푸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 불어판 책이군요? 그럼 당신은 알베르인가요?
책을 돌려받은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 내가 알고 있는 프랑스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에요. 알베르 카뮈.
그 뒤부터 그녀는 나를 알베르라고 불렀다. 듣다 보니 싫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가 따라준 잔을 비웠다.
- 마담은 처음부터 나를 신뢰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나는 웃으면서 그럴 수도 있다는 투로 말을 던졌다. 그렇지만 그녀가 진지한 어떤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요즈음 제가 너무 힘이 드나 보죠. 이렇게 당신의 눈을 바라보면서 거기서 나를 들여다보려고 하니까요. 제가 못됐죠.
그녀는 미소를 보이고 이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붉은 포도주 빛 머릿결 위로 한두 줄의 담배 연기가 떠오르더니 가로로 퍼지며 유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백포도주를 내 잔에다 따랐다.
- 자매란 별로 다를 게 없나 봐요. 제가 지독하게 싫어하는 것을 그 애는 겪고 있는 중이에요. 내 과거가 지금은 그 애한테 있어요.
나는 비로소 늦은 어젯밤, 그녀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비둘기가 들어와 살만한 작은 아파트, 그리고 신발이 세 켤레던가 아니면... 그중 어느 쪽 신발인가를 두고서 그녀가 말했던 말. 신경 쓸 것까지 없다구요. 내 동생이에요. 나는 다시 한번 잔을 비웠다.
- 마담, 확실히 못됐군. 이러면 알베르가 너무 힘들어지잖아.
나는 백포도주를 잔에 따르려다 말고 그녀를 쳐다보면서 웃음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대화에, 나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그녀의 행위에 동조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역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나는 다시 잔을 비우며 말했다.
- 아무려면 그렇지. 마담의 동생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깊은 밤에 당신과 함께 들어선 남자를 이해해 줄 수 있겠느냐구.
그녀는 <조앙ㆍ마두>를 운영하면서 적어도 이 도시에서만은, 처음으로 자신의 아파트에 남자와 함께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표현대로 뭐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동생은 그때까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를 기다리며 잠들지 못했고, 그녀 자신은 그렇게 항상 밤이 깊어 아파트로 돌아와야만 했다. 하얗게 쌓여 추위에 꽁꽁 언 눈 더미 위로 달빛이 내려와 은은한 회백색의 세상을 드러내 놓던 어젯밤, 늦은 그 시각에, <조앙ㆍ마두>의 출입문에 달린 은종을 울린 여인은 그녀의 동생이었다. 눈 속에 묻히진 않을 거라던 걱정을 해 댈 만큼 그녀의 동생은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위험했다. 그리고 그 생활이 세 해를 넘기고 네 해째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 알베르, 생활이란 익숙해지기 마련인가 봐요. 그리고 남는 것은 지치고 실패한 결과밖에는 없더라구요.
그녀는 실패한 결과라는 이 말을, 정확히 동생에게 하는지 아니면 그러한 동생과 함께 생활해 온 자신에게 하는지 나의 반응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말을 했다.
카페 <조앙ㆍ마두>는 조용하고 아늑한 시간을 타고 흘렀다. 적어도 고객들이 적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술잔을 기울일 시간에 이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하고 있기란 기억에도 별로 없었다. 한데 오늘은 모든 게 조용하고 아늑했다. 나는 백포도주를 다시 술잔에 따랐다. 그리고는 생활이란 때로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처럼 진지해질 때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의 붉은 포도주빛 머릿결은 너무 가까이 있다는 기분이었다. 거기에서 그녀가 사용하는 향수냄새가 느껴졌다. 그것은 붉은 장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럽고 상큼한 향기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동생을 생각했다. 카페 출입문의 은종이 울리고, 여인이 들어왔다. 내 앞의 카프리 병이 몇 개 더 비워졌고, 죄송해요, 정말. 하던 여인의 목소리.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고, 여인은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문득 혼란. 사람이 닮았던 것일까... 나는 술잔을 비웠다. 그때 출입문의 은종이 울리면서 손님들이 들어왔다. 꼬리를 물고 온 이야기가 즐거운지 그들은 한두 번씩 소리 나게 웃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시간은 이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