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inmaker Sep 24. 2024

(제1부) 쥐색 코트

  네온사인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그것은 톡, 톡, 톡 소리를 내며 밤을 알리는 신호처럼 보였다. 도시의 네온사인이 빛을 밝힐 때면 그네들은 문득 밤에 피어나는 꽃(夜花)처럼 느껴진다. 거리의 어둠을 밀어내고 화사하게 피어나 가슴을 물들이는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야화가 피어나는 풍경 안에서 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내 가슴은 때때로 밤하늘의 별빛처럼 깨어나고는 하는 것이다.

      

  창밖에 어스름이 내리면서부터 겨울바람은 더 거세게 불었다. 유리문 밖으로는 앙상한 몸체를 드러낸 가로수들이 바람에 휩쓸려 제 몸을 모로 눕혔다가는 일어선다. 차가워진 날씨만큼 사무실 안의 불빛이 회색으로 잠겨든 기분이다. 컴퓨터의 프리셀 게임을 몇 번을 했을까? 세 번을 이기기 위해서 적어도 새로운 게임을 다섯 번인가 시도했던 것 같다. 오늘이 두 번째 야근이다. 병가 중인 직원이 있어서 지사의 관리책임을 맡고 있는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중이다. 이층 창문의 건너편 건물에서 깜박거리던 네온사인이 주황색 불꽃을 몇 번 보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거기에 암흑 공간이 하나,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TOWN이라는 글자만 남긴 형체는 균형이 무너진 채 부서져 버린 장난감처럼 보인다. 나는 프리셀 게임을 멈추고 망가진 그 장난감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분을 보냈다. 그러다가 생각이 났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CD를 뒤적여 그중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팝송과 샹송이 모아진 CD다. 곡 제목을 읽다가 세 번째 곡목에서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이건 몇 해 전 언젠가, 가을이었던가... 축축한 비가 하루종일 내리던 날이었던 것 같다. 그날 밤에 <조앙ㆍ마두>의 붉은 머리색 주인이 무슨 이야기 끝에 웃으면서 보기에도 눈이 부신 노란 상자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 상자 안에 이것이 들어 있었다. 그날, 술을 꽤나 마셨던 것 같고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지금 희미해져 버렸다.      

  CD를 넣고 볼륨을 맞췄다. She is gone. 스틸 하트가 떠나버린 여인을 향해 고음을 올렸다. 그 고음이 서서히 더 높은 곳을 향해 반향 하다가 그 끝에 가서 멎는다. 다음은... Holiday. 실비아 바르텡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파리의 휴일, 그 하늘아래서 고혹하게 울려 퍼진다. 노래란 스피커를 떠나가는 순간 자유로워지고 감미롭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출입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 소리가 사방이 닫힌 실내 한가운데로 이제 막 나풀나풀 떨어지는 꽃잎 세 개처럼 느껴졌다. 떨어지는 세 개의 꽃잎 뒤로 출입문이 밀리면서 한 여인이 들어왔다. 여인은 사무실의 회색빛보다도 더 깊은 어스름을 뿌려놓은 쥐색 코트를 귀밑까지 깃을 올려 세우고 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직업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쥐색 코트 속의 그녀는 이런 내 미소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자신이 여기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그녀의 물음에 답을 한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눈은 내 눈과 마주쳤다. 순간 그녀의 눈 끝이 흔들리듯 느껴졌다. 안경에 가려졌던 흔들리는 눈 끝 위로 부드럽고 그러면서 또렷한 메스자국이 보였다. 쌍꺼풀자국이 눈 위를 그리고 있었다. 예쁜 눈이군. 실비아 바르텡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 눈과 함께 실내 공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는 눈 위, 두 개의 곡선이 쥐색 코트 안에서 우수를 그려내는 듯하다. Holiday가 회색의 빛 끝 어디에선가 멈췄다. 유리문 밖에서는 다시 겨울바람이 불어대는지 가로등 불빛아래 가로수들은 허리를 눕혔다가는 일어서기를 몇 번, 하다가 멈췄다. 차가운 바람이 어둠 속에서 몰려다니는 거리로 쥐색 코트는 나갔다.    

  

  밤새 기온이 내려가 좀처럼 눈을 볼 수 없는 이 소도시에서도 눈이 내렸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면 잿빛 하늘 속에서 무수히 많은 회색 점들이 하염없이 내려오는 것이다. 그 점들은 통행이 뜨음한 인도 위에서, 그리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 놓은 길 건너 가로수위에서, 쌓이고 쌓여 하얀 모습을 만들어갔다. 잿빛 하늘에서 점들은 계속 내리고 창밖 세상은 하얗게 변해갔다. 지난밤 소리를 내지르며 길 위를 달려 다니던 바람은, 그 어둡고 차가운 바람은, 아침이 밝자 자취를 감췄고 대신 눈이 내리는 하얀 설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 올해는 완전히 바닥 치는군요. 전국적으로 접수현황이 말이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끝장이 나는 게 아닌지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저쪽 본부관계자의 말은 사실 그대로였다. 그것은 이 고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삼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저쪽의 문제만도 아니었다. 모든 지역의 문제였다. 갑자기 쏟아져 내린 폭설로 곳곳의 도로망이 막히고 교통수단은 제 기능을 해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차단된 교통수단처럼 고립되어 세상 밖에 흥미를 잃은 것인가? 하늘에서는 눈이 끊임없이, 지루하게 내리기만 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지사의 교육기획관리팀 소속 직원들도 한 마디씩 자신들의 불안을 털어 내놓았다. 이 고장에서 이렇게 눈이 쏟아지는데 하물며 위쪽 지방이야, 본부지원센터의 연락을 통하지 않고서도, 더더욱 각 지사의 담당자 간의 연락을 통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 기다리는 것은 유일한 한 가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한가하게 무수히 내리는 저 잿빛 점들이 멈추어 주는 것뿐이다.    

  

  본부관계자로부터 또다시 전화. 통화. 폭설... 폭설 속에서도 노고가 많다. 접수현황이 좋아지고 있다. 이쪽의 관계자들이 그쪽 당신들의 노고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통화. 폭설... 그래, 망할 놈의 작자들. 당신들은 항상 그랬으니까. 매번 좋은 결과만을 가지고서 당신들은 그 게걸스러운 욕망을 충족했고, 그 욕망이 넘칠 듯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은 오로지 직원모두가 자신의 일신을 생각하지 않는 희생의 결과다, 라며 짧은 한 마디로 마무리했으니까. 지사에 소속된 우리 모두가 녹초가 되어 뻗어버린 뒤에나 그런 말씀을 하시지. 나는 씁쓸한 기분을 삼켰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나도 어제는 잊고 오늘만 생각하기로. 어제란 도무지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적어도 이곳의 생활에서는 말이다. 이곳 생활에서는.   

   

  내리는 잿빛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잠깐 상념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고개를 돌려보니 접수처에서 한 여인이 서류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 그녀의 시선은 짧은 순간 조금 먼 허공을 헛짚는 것처럼 보였다. 쌍꺼풀 곡선이 또렷한 눈매였다. 그 눈이 낯설지 않았다.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 전 추위가 시작되던 날 밤 퇴근 무렵, 서류를 받아 들고는 차가운 바람이 어둠 속에서 몰려다니던 그 거리로 사라진 쥐색코트였다. 그녀는 지금 주황색보다는 갈색에 가까운 제복차림이어서 추위에 꽁꽁 얼어있는 갈색 얼음덩어리다. 그 얼음덩어리에서 짧은 순간 따뜻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짧은 스커트 아래 엷은 살색 스타킹이 감싼 그녀의 다리가 보여주고 있는 느낌 때문인 듯했다. 그것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깨끗하고 하얀 부드러움이었다. 그녀 곁에서 세 명의 접수자가 더, 서류를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그녀의 손가락 하나가 서류 속의 일본현대건축의 흐름을 가리키며 눈은 접수처 직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류에 기록되어 있는 그녀는 스물일곱 살. 아직 미혼이었고, 이 소도시의 가까운 읍에서 생활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접수마감일을 하루 앞두고 우리 모두는 퇴근을 미룬 채 접수인원을 확인하고 서류를 정리했다. 그리고 본부에 보고를 마쳤다. 우리의 보고를 받은 저쪽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조금은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면서 수고가 많았다는 둥 아마도 작년의 현황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둥 그리고 다시 한번 정말 수고한다고 연신 시끄럽게 수화기에 대고 쏟아댔다.


  밤이 깊어지자 모두들 떠났고, 빈 사무실에 혼자 남은 나는 컴퓨터를 켰다. 프리셀 게임을 시작했다. 빨간색과 검은색의 카드를 순서대로 내려두었다가 에이스부터 점차적으로 쌓아 가는 이 게임은 네 개의 에이스를 함께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 불가능해서 새 카드를 받을 때마다 주의를 기울여 모든 카드를 잘 살펴 두어야 한다. 첫 게임은 거의 모든 카드를 다 열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두 장이 얼굴을 뒤집어 주질 않았다. 다이아몬드 빨간색 세븐이 제 순서에 얼굴을 못 내밀었다. 결국 이것이 뜨질 않아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첫 게임은 쉽게 내주고 말았다. 다시 새로운 게임. 프리셀 게임에서 내가 얼마나 승을 올릴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이것은 인간이 컴퓨터와의 게임에서 얼마나 이길 수 있을까라는 말이다. 나의 전적은 쌓여갔지만 승으로 점수를 받는 경우는 평균 세 게임에 한 게임이었다. 프리셀 게임에 몰두해서 연거푸 열 세 게임을 했다. 그리고는 다섯 번을 이겼다. 새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카드는 바뀌어져 나왔고 적어도 새 게임은 삼만 이천 개가 있었다. 물론 컴퓨터가 선택하는 각 번호는 단 한 번도 같은 경우의 게임으로 시작된 적은 없다. 우연히 컴퓨터의 전원이 나가서 다시 부팅을 해도 그것은 아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프리셀 게임의 묘미는 여기에 있었다. 컴퓨터가 선택하는 각 번호는 단 한 번도 같은 경우의 게임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거. 내가 프리셀 게임을 할 때만은. 아니, 적어도 삼만 이천 개의 게임 모두를 단 한 번호도 빠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하는 동안은. 그래서 컴퓨터의 하드가 닮아져 아예 박살이 날 때 가지는... 다시 거푸 다섯 게임을 하고 나서야 나는 컴퓨터를 끄고 추위 때문에 공기마저 얼어붙은 거리로 나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