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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오름이면 충분했다, 제주에서의 한 달

나의 취향 발견

by 프리드리머


저 멀리, 바다


"와, 바다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저 멀리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좋다. 그저 달리는 중에 스쳐보는 바다만으로도 괜히 입꼬리가 올라간다. 차창 너머 푸른색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나처럼 바다를 가까이 접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만의 특권 아닐까? 이 기쁨을, 매일 바다를 보는 사람들은 모르겠지.


"우리 바다 보러 갈까?"

꼭 가야만 하는 곳도, 시간 맞춰야 할 일도 없다. 그저 우리의 기분에 따라 바다를 향해 달릴 뿐이다. 내키면 언제든 바다로 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제주에 있다는 게 감사했다. 제주도민들은 이런 평범한 순간들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고 있을까. 매번 다른 얼굴을 한 해변이 곳곳에 있으니까.





오름 위에서


오름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평소 산책도, 등산도 즐기지 않는 나지만, 이상하게 제주의 오름은 꼭 올라야 할 것 같았다. 처음으로 간 곳은 백약이오름. 아이들은 처음엔 시큰둥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나와 남편보다 훨씬 앞서 걷기 시작했다. 둘이 손을 잡고 뛰기도 하고, 깔깔 웃으며 우리에게 달려오기도 했다.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다녔던 곳은 발도르프 유치원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산으로 나가 1시간씩 놀다 오는 곳. 그 시절, 기관지가 약해 소아천식을 걱정했던 아이들이 놀랍도록 건강해졌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산'을 좋아하게 된 건. 올라갔다 내려오길 반복해도 지친 기색이 없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며, 남편에게 슬며시 말했다.

“내가 발도르프 유치원 보내길 잘했지?” 괜히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오름을 오르던 길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단순히 '시원하다'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바다를 볼 때의 시원함과는 달랐다. 비염으로 늘 막혀있던 코까지 뻥 뚫리고, 맑은 공기가 몸속 깊이 들어오는 듯했다. 그 순간, 내 안까지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정상에 올랐을 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개운함이 밀려왔다. 그 자리에 캠핑의자라도 두고 하루 종일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고 싶었다.




살고 싶다, 제주에


오름의 바람이 마음속까지 스며들던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 오래 머물면 어떨까?'


우리 네 식구가 온전히 함께한 첫 한 달 살기. 코로나로 해외에 나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제주였다. 그래서 처음엔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게다가 제주는 이미 다섯 번이나 와봤던 곳이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하루하루 지날수록 제주가 다르게 다가왔다. 3박 4일 여행으로는 느낄 수 없던 감정들이, 살다 보니 천천히 스며들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제주도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

한 달은 짧았다.

이왕이면, 일 년은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에서 큰길 쪽으로 나오면 초록 잔디가 깔린 작은 초등학교가 있었다. 알록달록 칠해진 벽이 햇빛에 반짝였다. 이런 학교에 다닌다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졌다.

"얘들아, 제주에서 학교 다니는 건 어떨 것 같아?" 아이들에게 물었다.

"싫어. 난 크고, 친구들 많은 학교가 좋아."

그래, 시골학교의 단점은 아이들이 적다는 거지. 아이들의 대답에 괜히 아쉬움이 남았다.





느리게 살아도 괜찮은 곳


드라이브할 맛 나는 제주다.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신호등도 많지 않고, 막히는 일도 거의 없다. 차를 타고 달릴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해방감. 슈퍼를 갈 때도 차를 타야 하는 불편함은 있지만, 그 불편함마저 이곳의 여유로움에 묻힌다.


조금 느리게 살아도 괜찮은 곳, 그게 제주였다.

치앙마이, 그리고 제주. 나는 이런 도시가 맞나 보다. 한 달을 살아보며 나의 취향과 마음의 속도를 알아간다.


이렇게 좋은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은 이 환경이 얼마나 감사하고 황홀한지 잘 모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접하는 일상의 감사함을 잘 느끼지 못하니까. 떠나보면 알게 되겠지.


결국, 바다와 오름이면 충분했다. 그거면 이유가 되었다.

언젠가 내가 다시 제주로 돌아올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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