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잠시 휴업
“나, 한 달간 주방에 안 들어갈 거야.”
무심코 던진 말이 정말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한 달에 이틀 쉬던 남편과 한 달 내내 함께 보내게 된 제주 한달살기.
육아도, 주방도,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 왔던 지난날을 보상받기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매 끼니를 준비하며 하루가 흘러가고, 끼니 사이마다 간식이 기다렸다.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부터 저녁 설거지까지, 내 하루는 늘 주방 안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그러다 문득,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남편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입이 먼저 열렸다.
“나, 한 달간 주방에 안 들어갈 거야.”
신난다
예상 못한 건, 남편의 반응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엥? 이렇게 쉬운 일이었어? 순간, 내가 더 당황했다.
남편은 평소 집에서 요리를 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집에 머무는 시간 자체가 적은 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해 밤에 안주를 만들며 주방에서 뚝딱거린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금세 단품요리를 완성하곤 했다.
처음엔 솔직히 불안했다. '이래도 되나?' 싶어 자꾸 주방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남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성격이 느긋한 편이라 행동이나 말도 느린 남편이 놀랍게도 주방에서는 빨랐다.
'그럼 난 이만.. 주방에서 정말 발 빼야지.'
남편이 주방에 있는 동안, 난 책을 읽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자유시간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혼자 밥상을 차리고 "밥 먹자~!"를 외치던 내가, 준비된 밥상에 앉는다는 건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한 끼는 외식을 했고, 남편은 간단한 아침과 한 끼를 준비했다.
호텔 조식이 아니었지만, 꽤 짜릿했다.
아침마다 내 앞에 놓인 따뜻한 밥상,
그건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커피가 그렇게 좋아?
집에서 캡슐커피를 마셨고, 밖에서는 늘 스타벅스만 갔다. 그런데 제주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커피가 있었다. 커피를 좋아했지만, 가끔은 같은 맛이 질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제주는 달랐다. 개성 있는 카페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지도 위에 가보고 싶은 카페를 표시해 두었고, 이동 중 근처에 하나라도 있으면 외쳤다.
"오늘은 OO카페 가야 해!"
때로는 30분을 돌아가기도, 가던 길을 거꾸로 돌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커피가 그렇게 좋아?" 그리고 아무 말없이 핸들을 돌렸다.
커알못인 남편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스타벅스랑은 확실히 다르긴 하네. 여기 커피는 특이하다."
연하고 향긋한 커피를 만나면 아이들에게도 살짝 맛보게 했다.
"이 커피는 진짜 맛있다. 나 또 줘."
"엄마는 이런 게 맛있어?"
아이들의 반응들이 재미있었다.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마시는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창밖으로는 제주의 풍경이 흐르고, 차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과 커피 향이 가득했다.
운전은 남편이, 커피는 내 손에.
나만의 힐링타임이었다. 커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 순간 때문이었을까.
떠나보니,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나, 각자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오며 살아왔다. 결혼 후 5년간, 시댁 관련된 일을 빼면 크게 싸울 일도, 크게 감동할 일도 드물었다. 그런데 제주에서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주방을 벗어난 나의 한 달은, 내게 선물 같은 시간이자 쉼표였다.
요리를 못하지도, 잘하지도 않았던 나였다.
먹성 좋은 아이들은 언제가 "엄마가 해주는 게 제일 맛있어."라며 잘 먹어주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요리는 내게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하는 일, '의무'에 가까웠다.
한 달간 주방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니, 오히려 요리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생각보다 꽤 따뜻한 일이란 걸 이제야 알았다.
역시 떠나봐야,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