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바다, 너무 먼 당신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 저거 저거 재미있는데.'
스무 살 여름, 친구들과 속초해변에서 파도타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는 수영을 못하지만, 파도에 몸을 맡기면 '붕~'뜨던 그 느낌, 그 순간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그 재미를 느껴봤으면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바다에 들어가길 꺼렸다.
"상어가 오면 어떡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2호의 말에 웃음이 났다. 이 나이에 상어 걱정이라니, 조금 오버 아닌가 싶었다.
우리 가족에게 바다는 물놀이 공간이 아니었다. 그저 모래놀이를 하거나 산책하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바닷물에 발끝조차 담그려 하지 않았다. 예전 제주에서도, 괌에서도, 푸켓에서도 바다는 언제나 '풍경'이었지, '놀이'의 대상은 아니었다. 파도가 무섭다고 했다.
발끝에 물이 살짝 스쳐도 도망가는 아이들이었다. 과도한 신중함과 겁이 많은 탓이었다. 둘 중 한 명이 즐기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아이도 함께 놀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바다 앞에서는 늘 똑같았다.
천천히 크는 아이들
1호는 초등 저학년까지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연말이 되면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영화를 틀어줬지만, 아이는 혼자 다른 놀이를 했다고 했다. 이유는 단 하나, 무서워서였다. 애니메이션인데 대체 뭐가 무서울까 싶었지만, 아이는 그랬다. 어릴 때 문화경험을 쌓게 해 주려고 뮤지컬이나 음악회를 데려갔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무대의 사운드가 너무 크다며 두 귀를 막았다. 그것도 둘 다 똑같이.
두 아이 모두 자극에 약했다. 영화관에 가면 조명이 꺼지는 순간부터 긴장했고, 내 손을 꼭 잡은 채 스크린을 바라봤다. "소리가 왜 이렇게 커~." 소리에 불편함을 느꼈고, 다음부터는 스피커랑 가장 먼 뒤쪽 자리를 부탁했다. 그때부터 나는, 굳이 아이들을 공연장이나 영화관에 데려가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언젠가 스스로 즐길 수 있을 때, 그때 가면 되니까.
또래보다 그네도 늦게 탔고, 자전거도 늦게 배웠다. 2호는 6학년이 된 지금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배울 생각이 없단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나도 답답했다. 남들 다 하는 걸 왜 우리 아이들만 못할까, 혹시 신체발달이 느린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았다. 속으로 조급했을지라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에 하지 뭐." 그저 그렇게 웃으며 넘겼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아이들은 자기만의 속도로 자라는 거니까.
오늘의 도전은, 여기까지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숙소에 수영장이 있었지만, 새로운 곳을 가보고 싶었다. 굳이 비용을 내면서까지 다른 수영장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이호테우 해변에 무료 수영장이 있다는 정보를 발견했다.
'어쩌면 아이들이 바다에서 놀 수 있지도 않을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리 숙소는 제주의 동쪽, 이호테우 해변은 서쪽이라 거의 왕복 2시간이 걸리지만, 바다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옆에 수영장이 있으니까 헛걸음은 되지 않을 터였다.
예상과 달리, 바다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먼저 말했다.
"우리 바다에 들어가 볼래!" 그 말이 어찌나 반가웠던지.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조금 떨어져 걸었고, 남편은 아이들과 손을 잡고 바다로 향했다. 바닷가에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이 짧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비록 끝내 파도 속으로 뛰어들지 않더라도, 스스로 선택해 한 걸음 내디뎠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남편도 아이들의 속도에 맞춰 조심스럽게 바다에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섰다가, 다시 물러서기를 반복하더니 결국, 아이들은 무릎 높이를 넘기지 못하고 물 밖으로 나왔다.
"엄마, 이제 수영장으로 가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비록 잠깐의 바다였지만, 얼굴은 밝았다. 새로운 도전 후 작은 성취감이 표정에 담겨 있었다.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겠지만 내게 그날은, 아이들이 조금 더 세상 가까이 나아간 특별한 하루로 남았다.
우리만의 속도대로
물에 들어가지 않는 내가 기다리기엔, 바다보다 수영장이 낫다. 수영장 옆에는 그늘막과 평상이 있었으니까. 수영장으로 돌아오자, 바다에서 보이던 긴장된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편안해 보였다.
'그래, 마음 편한 게 최고지.'
수영장 물이 해수라 그런지 물에 더 잘 뜬다며 두 아이가 몸을 뒤로 뉘어보며 깔깔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바다 옆 수영장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래, 뭐 바다에서 안 놀면 어떠랴.
솔직히.... 아주 조금은 아쉬움이 남았다.
언젠가 바다로 다시 나아갈 날이 오겠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파도는 늘 그 자리에 있고, 조금씩 다가가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