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굴레
빚의 대물림
아빠는 비동거 가족이라는 이름처럼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무책임했고, 외면하기엔 피할 수 없는 그림자였다. 나는 그의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의적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그는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삶과 가족, 딸에 대한 책임감은 없었다. 내가 이십 대 중후반이 될 무렵, 과도한 음주와 흡연으로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외면했다. 그의 문제가 내 삶에 스며들까 봐 철저히 분리시키고 싶었다.
어느 날, 아빠는 이 시대에 흔치 않은 결핵에 걸려 부산의 한 골방에서 빈 소주 병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립마산병원에 입원한 그는, 적은 월급으로 겨우 입에 풀칠만 하던 내게 병원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사야 한다며 돈을 요구했다. 마음속으로는 차라리 사라졌으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잔인한 생각에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으면 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일 년 만에 병원에서 마주한 아빠의 모습은 처참했다. 백발의 깡마른 노인이 병상에 누워 있었다. 결핵 합병증으로 다리가 앙상해서 걷지도 못하는. 초라하고 왜소한 그 사람이 아빠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를 보자마자 보통 일이 아니라는 직감에 목이 멨다. 그는 알록달록 색칠한 나비그림을 가리켰다. 심리 프로그램 시간에 완성했다며, 치아가 빠져 잇몸이 드러나 흉물스러워진 입으로 헤벌쭉 웃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따뜻한 위로 대신 짜증과 화였다. 도움을 줄 수 없는 무력한 현실과 인생의 밑바닥까지 보고야 만 아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이 아빠의 임종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달려간 병실에서 아빠는 맥박과 호흡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고 의료진은 한 시간 이내에 숨을 거둘 거라 전했다. 아빠의 손과 발은 퉁퉁 부어 있었고, 의식은 없었지만 청각은 마지막까지 남는 감각이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건네라고 했다. 할 말이라... 순간,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미안하다는 말이 아빠를 살리지 못해 미안한 건지, 마지막 말을 건네라는 사무적인 의료진의 말에 형식적으로 차오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인공호흡기를 단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아빠를 마주하자 수많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토록 미워서, 차라리 사라지길 바랐던 사람이었는데… 막상 서서히 꺼져가는 아빠를 보니 불쌍했다. 황달로 노랗게 변하고 부어오른 손을 조심스레 잡고, 말 대신 눈물로 흐느꼈다.
그 순간, 아빠의 눈에서 마지막 눈물이 흘렀다.
의사는 짧게 말했다.
13시 15분. 사망.
슬픔이 밀려올 틈도 없이 차갑고 잔인한 현실이 먼저 나를 덮쳤다. 죽음은 경건한 애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돈'이라는 적나라한 숫자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치료가 하루에 72,000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돈이 있나? 하루라도 빨리 화장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음을 마주한 자리에서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끔찍하게 경멸스러웠다.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어 할아버지의 쌈짓돈을 끌어모아 겨우 화장만 할 수 있었다. 막 화장장을 빠져나온 나무 유골함은 뜨거웠다. 그 위로, 내 뜨거운 눈물도 뚝뚝 떨어졌다.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나는 죽은 자에게 물려받을 재산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빚이라도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안심상속 서비스를 신청했다. 바람은 하루 만에 산산조각 났다. 신청 다음 날, 각종 지방세 체납 내역이 담긴 문자가 날아왔다. 결과를 모두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 빚은 피해야만 했다. 무조건.
급하게 법무사부터 찾았다. 빚이 재산보다 많으니, 이를 물려받지 않을 방법으로 '한정승인'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법무사의 지시에 따라 각종 부채 리스트를 만들어 제출했다.
또 하나의 문제. 서류상 아빠 앞으로 실체도 없는 차 한 대가 있다는 것이었다. 차를 말소해야 한다는 말에, 모든 일을 뒤로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무더운 여름, 아스팔트 위로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날이었다. 차량등록사업소와 행정센터를 오가며 서류를 떼고, 이리저리 줄을 섰다. 죽은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인데 왜 이렇게 많은 절차가 필요한 걸까. 죽어서까지도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그가 지긋지긋했다.
법원에서 한정승인 판결문이 날아왔다. 치열한 서류 전쟁 끝에 겨우 받아낸 결과였다. 홀가분하기보다는 억울함이 컸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의 책임은, 그의 빚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흔적은 내게 '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어떻게 사라질지를 고민하기 이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