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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Apr 25. 2024

만추

7학년 1반 국민일기




 풀벌레도 조용히 우는 가을 저녁, 밥상에 묵채 두 그릇이 올려져 있다.

"같이 가 줘서 고마워요..."

"그뤠!!"

늘 그렇듯 무뚝뚝한 말을 끝으로 지아비가 고개를 젖히며 그릇을 비운다. 두 그릇의 묵채가 완성되기까지 고된 거 하나 없었다.



늦가을이 되면 우리는 망치, 포대, 앞치마를 수레에 실어 도시락을 들고 산으로 소풍을 갔다. 소복하게 자리한 정취를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낙엽 속에 숨어있는 햇살이 터지며 바스락거린다.

지아비가 작은 망치로 상수리나무의 굵은 줄기를 두드린다. 간신히 매달려있던 도토리들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우두두 장대비로 쏟아진다.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자, 나른하게 낮잠을 자던 산이 몸을 뒤척인다. 한 번 더 두드리면, 또다시 후두두둑...


큰 주머니가 달린 앞치마에 떨어진 비를 줍고, 주머니가 다 채워지면 포대에 옮겨 넣는다. 그렇게 이나무 저 나무 아래서 채집을 하던 캥거루 두 마리는 앉아 때늦은 점심을 먹는다.

도토리 포대자루와 함께 먹는 도시락은 별 반찬 없어도 꿀맛이다. 혼자는 무서웠던 산인데, 지아비와 함께 있으니 든든하다. 올해도 도토리를 줍는 가을소풍은 우리 밭처럼 대풍년이다. 이런 소풍이면 농사 대신도 하겠다.






도토리는 떫은 맛을 빼줘야 해서 우선 물에 한참 동안 담가놔야 한다. 그렇게 떫은 기를 제거한 도토리를 주면, 지아비가 오토바이를 타고 방앗간에 간다. 곱게 갈린 도토리가루를 받아오면, 붉은 가루의 떫은 맛을 제거해주기 위해 가루의 붉은 기를 또 빼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루를 물에 불리고 고운 채반에 몇 시간 씩 치대 주면서 붉게 남은 떫은 맛을 빼준다. 그렇게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지아비가 마당 한켠 시커먼 가마솥에 뭉근하게 불을 때기 시작한다. 수없이 손을 탄 도토리 반죽이 가마솥에 들어가면 이제부터는 눌어붙지 않게 긴 주걱으로 계속 저어줄 차례.  묽다 싶으면 채반 아래 가라앉아있는 전분가루를 넣고, 되다 싶으면 도토리 물을 넣으며 묽기를 맞춘다.


그렇게 한참을 저어 주다 보면 어느 순간 찰지고 되직해지는 순간이 온다. 젓던 주걱을 솥에 꽂아도 눕지 않으면 불을 빼준다. 열을 좀 식힌 후에 네모나게 잘라서 냉장고에 보관하면 끝이다. 나무에 붙어 자던 도토리가 도토리 가루가 되었다가, 결국 도토리묵이 되어 알밤 같은 내 자식들을 기다리며 냉장고에서 다시 잔다.


함께 캥거루가 되어 도토리를 주워준 지아비를 위해 묵채를 만든다. 간장 마늘 파 참기름 고춧가루 깨소금으로 양념을 만든다. 다시마 국물에다 채 썰어둔 도토리묵과 무생채를 넣고 김과 양념을 올리면 끝이다. 지아비가 고개까지 젖혀가며 열심히 먹으면 비로소 가을 소풍이 끝난다.


지아비와 소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끌고 온 수레에 도토리를 실어 밀고 가는 우리 주인 할아버지... 노을을 당당히 맞으며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더 노을 같았다. 상수리나무는 소풍이 끝나고 귀가하는 두 그림자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내 앞치마폭에 후두두 알밤을 떨어뜨려 보내던 그날의 도토리나무는, 할머니가 되어 홀로 된 나를 기억해줄까...


나무를 흔들어줄 지아비도, 산을 오를 건강한 내 다리도 과거가 돼버린 다신 오지 않을 어느 만추의 이야기...

두 그릇의 묵채가 완성되기까지 정말 고된 거 하나 없었다.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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