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풍경들에서 나는 소리들이 옅어졌다. 바람에 벼가 흔들려도, 부슬비가 내릴 때 나는 소리에 대한 기억이 옅어져 버린 걸 보면.
어린 시절 중이염을 앓았었고,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된 치료를 사실상 할 수 없었다. 아마 그랬기에 남들보다 빨리 세상의 소리와 멀어져 가고 있었을 거다. 자식이 두세 번 말해줘야 겨우 들리더니, 어느 순간에는 지아비가 거의 소리를 쳐야 알아들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아픈 건 괜찮다만 가족이 답답해하면 안 된다. 자식 귀찮게 하는 걸 싫어하는 나지만, 검사해 보고 봐서 수술이라도 하자는 부탁을 자식들에게 했다.
막내딸이 사는 도시로 나와 병원에 가보니 한쪽 귀는 거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나마 나은 귀는 수술보단 보청기가 낫겠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하신다. 수술보다 간편하게 장치하면 되니 여러모로 잘됐다 싶었다.
홀로 시골에서 내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을 지아비에게 딸이 나 대신 전화를 했다. 내가 보청기를 하게 될 거라는 소식을 말없이 듣고서는, 지아비가 수화기 너머로 진한 진심을 건넸다.
"너거엄마 보청기, 내가 얼마든지 사 줄 테니 제일 비싸고 좋은 걸로 해줘라. 그런 거 해주려고 내가 지금껏 열심히 돈 모았다. 너거엄마 없으면 난 단 하루도 못 살 정도로 나한텐 제일 소중한 사람이데이..."
자기아부지의 마음을 나에게 전하며 막내가 눈시울을 붉힌다. 아빠가 엄마를 너무 아끼고 사랑하신다고... 그 말에 그냥 미소만 띄웠다.
오랫동안 나도 모르게 잃어갔던 귀에 보청기가 새살이 되어준 순간, 지금껏 소리 없이 옅어져 간 세상 모든 소리들이 다시금 선명하게 튀어나온다. 병원 밖을 나서는데 대로변에 들어올 때는 못 들었던 굉음에 놀라 어깨가 움찔한다.
아 도시의 차 소리가 저리도 요란했구나...
어쩌면 수술할지도 모르기에 준비했던 두툼한 옷가방을 다시 막내 차에 싣고서 하루라도 더 같이 지내고픈 시골 지아비에게 달려간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시끄럽던 도심을 빠져나와 한적한 차선이 펼쳐진다. 남의 논에는 무얼 심었나 빼꼼히 내다보는데, 막내가 활짝 내려준 창문으로 익숙한 기운들이 훅 찾아온다. 좀 전까지 가로수를 휘감으며 놀던 선선한 가을바람과, 가로수 아래 하늘거리던 코스모스 향기. 하늘하늘한 촉각과 후각에 뒤이어, 바람이 가로수와 노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한다. 새로운 감각이 추가된 고향은 코스모스 꽃잎 소리처럼, 부드럽고도 가벼운 내 마음같이 다시금 특별해진다.
참는 게 미덕이라 여기고 불편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살아온 나. 미련하고 딱하다고 말해도 나는 괜찮다. 어릴 적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어도, 지금 거금을 들여서라도 소리를 사 주겠다는 지아비가 내 곁에 있다. 지아비가 사준, 소리가 들리는 고향은 오래 봐왔어도 새롭고 귀하다.
막내에게 내 목소리를 써서 말한다.
"인쟈는 나무가 흔들리기만 하는 기아이고, 바람소리까지 다 들린데이."
그 목소리를 들은 막내가 지그시 날 바라본다. 마치 지금 자신의 마음소리는 안 들리냐고 묻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