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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May 02. 2024

또다시 봄

8학년 2반 국민 일기




섣달이 끝나가는 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차례상에 올릴 음식들도, 식구들 다 먹을 식혜도.  평생 일만 해온지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명절은 영 어색하다.

쭈그려 앉아 밭을 안 매도 되는 시점부터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젊을 때는 밭에게 갇혀, 지금은 늙음에 갇혀 이 동네를 못 빠져나오는 셈이다. 동네 사람들 다 그렇지 뭐.


그러니 자식들이 우리 엄마 평생 고생만 했다고 안쓰러워 해도 나는 괜찮다. 동네 사람들만큼 힘들었고, 동네 사람들보다 더 착한 자식들이 함께하니 충분히 행복하게 산거다. 요새는 내 인생에 안 어울릴 만큼 편하게 놀고먹고 있고.


그래도 내 인생에 어울리는 건, 힘들어도 집에 지아비 있던 시절이다. 지금은 선산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아비를 생각한다. 봄 같던 우리가 봄날에 식을 올렸고, 밭에 갇혀 수많은 봄에게 물을 주고 자식을 키워왔다. 그 인생은 봄이란 계절과는 영 안 어울리긴 했다만, 그래도 봄 속에서 지아비와 함께할 수 있어 좋았다. 편안하고도 외로운 오늘의 겨울들보단...



지아비가 살아서 건재하던 몇 년 전 봄날. 우리가 식을 올린 그날의 온도와 비슷했던 그날에, 군에서 50주년 이상된 건강한 노부부 중 5쌍을 뽑아서 전통혼례식을 치러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라 생각하고 한 귀로 듣고 바로 흘러버렸는데 어쩌다 보니, 그 낮은 확률을 뚫고 우리 부부가 당첨되어 버렸다. 등 떠밀리듯  자리를 빛내러 나가게 되는 상황. 자식들 다 보는 앞에서 전통혼례식이라니... 나는 상상만 해도 얼굴이 일출처럼 붉게 익는데, 내 옆에 지아비는 내 속도 모르고 싱글벙글 즐기는 눈치다.


드디어 당일, 자식들과 손주들이 오기 전에 새신부인 나를 단장해 주려는 젊은이들. 쭈글쭈글 할매 얼굴에 신부 화장해 주는 고운 손들에게 괜히 미안했다. 연지곤지를 찍는 순간은 잠깐이었지만, 수줍음은 오랫동안 붉게 물들었던 것 같다. 화장을 끝내고 전통혼례복을 입고 대기실 밖으로 나가니 지아비도 옷 갈아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십 년 전 그날처럼 마음이 함께했고, 그날처럼 옷을 입었어도 몸은 그날과 달리 늙어있었다. 그래도 그날과 달리 우리 새끼들이 줄어든 우리를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큰아들은 지아비를, 작은 아들은 나를 업고서 막내가 써준 전상서를 들었다. 결혼은 우리가 하는데 왜 애들이 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친정에서 오십 년 전 식을 올릴 때도 엄마는 서운해했다. 결혼식 때 온 하객들 중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하객들 중에는 가난한 집에 시집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그래도 밭에서 수많은 봄을 뿌리고 가을을 거두면서 살아남았고, 자식들도 자라 이렇게 결혼식을 축하해주고 있다.


비가 안 와도 아픈 내 무릎과 달리 자식들은 평생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으면...

내가 친정엄마를 못 잊듯이, 내 자식들도 언젠가 나를 주름처럼 깊이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날 막내 편지에 오래 함께 해달라는 자식들의 부탁을 지아비는 재작년에 깨버렸고, 나만이 이 약속을 지켜나가고 있다. 내가 없어도, 나를 깊게 기억하더라도, 자식들과 손주들과 이웃들이 건강하게 오래 지내면 좋겠다.

내가 없어도 안녕한 사람들을 떠나 내 옆에서 환하게 웃던 지아비의 곁에서 그날의 봄처럼 다시금 수줍게 웃을 수 있도록...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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