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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May 16. 2024

호접지몽

7학년 9반 국민일기




 시간은 나비를 닮았다. 고생을 겪으면서는 그렇게 느리게 가던 것이, 멀리서 보면 사라질 듯 작아져버리니...

 다행히 나보다 덜 고생한 손주들의 시간도 나비처럼 흘러가 어느새 성인이 된 내 강아지들. 손주들은 빠르게 자라나는 시간같이, 언젠가는 끝나는 음악같이, 나비처럼 나부끼고 있다. 자식들이 틀어놓은 음악은 나비의 날갯짓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지만, 손주들의 춤사위와 음악과 이 순간이 끝나간다는 특성은 본질적으로 나비와 같으리라. 나와 지아비가 할 일은 나비처럼 지나갈 시간 위를 나비를 다루듯 소중히 바라보는 것.


 물기 묻은 초여름, 바람이 초록을 타고 우리 집 나지막한 거실 창문을 타 넘어온다. 여름 바람과 달리 젊음으로 더운 춤바람에 키득키득 웃으며 함께 즐기는데, 언젠가 창틈으로 다시 기어나갈 바람 역시 사라질 나비를 닮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온 세상은 나비 같다. 괴로워도 아름답고,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이. 다시 찾아는 왔으나 젊음이 사라진 우리 내외의 생일처럼...


 평생 아픈 것도 모를 정도로 여름처럼 건강하던 양반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겨울을 앞둔 풀들처럼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다. 젊음을 다 뺏기니, 이번엔 건강을 뺏어가기 시작한다. 천지는 나비처럼 예쁘고도 매정하다. 아직은 나와 자식들은 기억하지만 손주들의 이름을 물어도 대답을 주저하는 걸 보면...

 이름도 모르겠는 손주라는 애들이 할아버지 생신이라고 살랑살랑 춤을 춘다. 지아비는 얼굴도 잘 기억 안나는 젊은이들이 시골까지 와 자기 생일을 축하해준다는 게 고마웠을까. 아니면 자식들이 낳은 소중한 자식들이 이름 모를 젊은이로 멀어져 가는 게 매년 오는 여름 햇살처럼 덧없었을까. 지아비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젊음 앞에 생명이 빼앗긴 듯 야위어서 젊은이들의 춤을 바라보았다. 마치 둘 다 정답인 양.


 춤바람과 함께 지아비의 생명도 얼마 안 있어 끊겨버렸다. 먼 강을 건넌 건 그 이듬해였지만, 지아비는 나 말고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기에. 당신의 자식이자 아내의 자식인데 당신은 기억 못 하는 중년들로 멀어졌으니, 당신은 오죽 답답했을까... 젊음과 건강만 뺏으면 되었지, 젊음과 건강을 주고 얻어낸 기억들까지 뺏을 건 뭔가.  역시 천지는 나비처럼 잔인하다.




 다 뺏어놓고서 지아비 산소 위에 온유한 햇살을 비추어준다. 빛을 먹고 자라나는 잔디들이 지아비가 길러낸 젊은이들을 닮았다. 얼굴이랑 이름은 기억 안나도 지아비를 감싸주는 것이... 마지막 축제가 되버린 지아비 생일에, 모르는 젊은이들이 당신 집에서 춤을 출 때, 기억에 익숙한 음악을 틀고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던 자식처럼. 부축을 받고 일어선 지아비가 음악에 섞여 이름 모를 젊은이들과 이름 모를 춤을 추었다. 마치 나비처럼...


 흘러가버리는 기억 속에서도 그런 자식들과 손주들은 지아비의 자랑이었던 것 같다. 가을 하늘처럼 기억으로 선명해지는 날에는 지나가는 자식 누구라도 붙들어 앉히곤 뿌듯한 표정으로 자랑이 늘어진다. 그 시절 어려운 형편에도 자식들 착하게 커주고, 당시엔 동네서 몇째 가는 어려운 가계였는데 지금은 이 동네에서 몇째 갈 정도로 열심히 잘 살았다고.  그것은 기억을 빼앗기고도, 반드시 기억하고 싶었던 당신의 보물이었다.



 지금은 생각한다. 도무지 보물을 두고 떠날 자신이 없어 차라리 기억의 줄을 애써 끊고서야 겨우 홀가분하게 떠난 것이 아닐까. 기억을 뺏긴 것이 아니라, 젊음과 건강이 뺏긴 당신이 평안히 누울 수 있도록 망각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나비 한 마리가, 산소 위에 날아와 앉는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날아가버릴 것처럼...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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