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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May 30. 2024

다시 온 오후를 색칠하며

8학년 2반 국민일기



 더 이상 농사일을 하지 않는 요즘, 내가 하는 일은 손님을 기다리며 마당에서 손님 대신 찾아온 바람을 맞는 것뿐이다.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하는 자식들과 상추밭을 어지르러 온 고양이가 마당을 딛고 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한 명.


"어머니, 잠은 잘 주무셨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매일 아침 안부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찾아와 필요한 거 있으면 다리가 불편한 나를 위해 사다 주기도 한다. 새로운 바람이 마당에 드는 것은 익숙해도, 새로운 사람이 마당을 딛는 건 낯설어서 마음은 마당처럼 즐겁게 울린다. 즐거운 울림 중 한 마디. "어머니, 이제 숙제가 있어요."


 숙제? 내가 해온 숙제는 파를 다듬거나, 마늘을 까거나 밭일 하는 것밖에 없었다. 지아비 보필하고 자식 기르기밖에 내 숙제는 없었는데. 생각이 가득 차는 중 친구는 빨간 부직포 가방을 건넨다. "다음에 저 올 때 여기까지 칠해 주세요."

그렇게 여든둘에 나는 숙제를 받았다.



 다음날 낮, 상을 펴서 그 위에 숙제거리를 올려다 놓았다. 빨간 부직포 가방 안에는 스케치북, 크레용, 색종이, 가위 같은 게 들어있다. 내가 결혼 전에 꽃수를 놓을 때 가지고 있던 규방칠우를 닮았다. 수를 놓을 때 내게 드리워진 게으른 햇살의 나이가 환갑이 되어서야 다시 돌아왔다.


알록달록한 꽃, 장독대, 동물 그림들을 꼼꼼히 색칠하고, 색종이를 잘라 붙였다. 실과 바늘에서 종이와 크레용으로, 한복에서 몸빼바지로, 땋은 긴머리에서 흰 짧은 머리로 환갑 동안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 환갑 동안 많은 것이 바뀌는 아래에서도 태양이 바뀌지 않았듯, 나는 같은 오후의 태양 아래 홀로 집을 지키며 꽃을 그리고 있었다.


 주말에 찾아온 자식이 이런 나를 모범생이라고 추켜세운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세끼 식사 꼬박 지키고, 하루에 한 번은 누워 30분여 다리 스트레칭도 잊지 않으며, 뉴스도 챙겨봐 왔는데, 복지사가 숙제를 시켰다는 이유로 그렇게 성실하게 색칠을 하냐며 말이다. 나는 뒤늦게 중학교에 입학한 것처럼 웃었지만, 중학생이라고 하기엔 색칠을 하며 잊고자 하는 잡념의 내용이 너무 슬프다.


 색칠을 하지 않았을 때는 바람이 찾아와 전해준 과거의 이야기들이 나이만큼 많아져버려, 나의 색칠공부는 중학생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학교를 못 가고부터 있던 소소한 슬픔들을 잊고자 하는 것에 더 가까우니까...

 그러니 자잘한 꽃그림 잘 그렸다고 내 그림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자식들을 보며, 나는 그냥 아이처럼 웃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여태 수놓아온 내게 남은 이 행복들을, 바늘이 아니면 호미로라도, 호미가 아니면 색연필로라도 계속 그려내겠다고...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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