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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Sep 05. 2024

글도 하얀 농사더라

8학년 2반 국민일기




 한평생 검은 들 위에서 다양한 열매들을 피우며 살아오다가, 팔순이 지난 요즘에서는 하얀 종이 위에 여러 색을 칠하며 살고 있다. 평생토록 하는 일이 비슷한 걸 보니, 나는 살만한 삶을 살았나 보다. 복지사가 내준 숙제를 들일을 하듯이 하나하나 해결해간다. 매일 조금씩 하면 되는데, 미뤄둔 일감을 못 보는 관성 탓에 한 번에 끝내느라 해가 있는 내내 하얀 밭에서 숙제를 한다. 숙제를 다 해오니 복지사도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다음 주에는 새로운 하얀 밭이 몇 권 더 생길 것이다.

오후 내내 하다 보면, 서산에 해가 진다.



 하얀 밭에는 중간중간 내가 거름을 줘야 한다. 빈 그림에다가 색칠을 하거나, 물건을 계산하거나, 끝말잇기를 해결하는 등 거름을 치면 칠수록 하얀 밭은 자꾸만 넓어진다. 하면 할수록 남는 땅이 줄어드는 밭일이랑은 조금 다른 거 같다.



 한 주 숙제가 다 끝내고 마지막 장. 이것만 끝내면 집에서 집을 나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어야 할 거름이 여기 있다.

"한 주 동안 기쁘거나 슬픈 일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일을 적어보세요."

 밀리지 말라고 미리 해놨더니, 제일 힘든 숙제가 남아있었다.



 막내가 요즘 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매일 전화하는 와중에 취재해도 되냐고 이따금 옛날 일들을 물어도 보는 걸 보면 진짜 나에 대해 쓰고 있는 거 같긴 한데, 뭔지도 몰라 고맙다는 말은 안 했다. 다만 취재를 한다는 날이면, 먹던 저녁도 급히 물리고 내 목이 신나서 과거를 이야기했다.


 딸내미한테 이야기할 때는 잘만 기억나던 것들이 저 빈칸 아래에서는 종이처럼 하얗게 샌다. 씨앗을 심는 일은 익숙한데, 씨앗을 만드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져가는 하늘 위에 내 손이 다 떨리는 이순간...

하얗게 비어버린 마음이라면 쓸 수 있는 건 오롯이 진실밖에 없다. 자식과 이웃들을 배려하는 말 대신, 종이처럼 하얗게 솔직한 내 마음을 불러본다.








 다 쓰고 창을 바라보니, 꽃이 다 떨어진 라일락이 잎을 내고 부드러이 나를 바라본다. 꽃이 떨어져도 내일을 맞는 모습이, 해가 져도 다시 찾아올 아침과 닮았다.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그림책 중간에 '진정한 8학년 국민일기' 세 줄이 있어 이를 토대로 글을 작성했습니다.

일기는 원문 그대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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