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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Aug 22. 2024

강 너머로 보내는 연서

8학년 2반 국민일기



 덜그럭 덜그럭...

제 발에는 보이지 않는 세간살이가 많습니다. 해가 갈수록 세간은 늘어가고, 나의 걸음은 느려져가네요.

오늘의 느린 걸음은 당신에게로 갑니다.


 나뭇가지에 한 손으로 겨우 매달린 저 붉은 이파리들은, 위태로운 와중에 한 손을 흔들어요. 그런 마음들에 밝아진 햇살 같은 길을 유모차에 의지해 한 걸음씩 다가갑니다.


 당신이 평화로이 쉬는 나지막한 선산.  한평생 흙길이 맨질맨질하도록 같이 다니던 이 길은 포장되어 잘 굴러가는데, 내 다리만 울퉁불퉁 걸리적거리네요. 당신에게 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당신에게 가는 길이 조금 더 가까워져 갑니다. 어느 시간과 어느 거리를 걷든, 나는 세간을 달고서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나처럼 굽은 길을 지나면, 당신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바람소리도 다 들리고, 새들이 대신 지저귀고, 햇살이 깊은 잠을 더 재우는 이곳에 당신의 흔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경계선 같이 고요한 곳인데도 이웃집의 저녁연기가 보입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데 차원이 다른 이곳은 우리를 닮았네요.


 나는 너무 많이 매달고 있고, 당신은 너무도 가볍습니다. 우리는 무게 차이가 너무 나서 만날 수 없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열기엔 우리 집 방문은 상대적으로 너무도 무겁군요...


 당신이 잠든 자리 위에 이불처럼 보드라운 푸른 잔디를 어루만져요. 파르르 바람이 스치우는 이 소리. 당신이 반겨주는 거 맞지요.

가벼운 차원의 동네에서는 잘 지내지요? 그 집은 너무 가벼워서 제가 들어갈 수 없을 테니, 외롭지는 않은가요?


 제 걱정은 하지 마이소. 걱정하기엔 발에 세간이 너무 많아요.


 작년에는 첫 손주가, 올해는 둘째 손주가 곧 결혼하는 거 알지요? 쳐다만 봐도 닳을 것처럼 고운 한쌍이 인사하러 내려왔었어요. 나 혼자 절 받는데 당신 생각이 났어요. 내가 애들한테 전해 듣고 당신에게 다시 전해줄게요. 가벼운 당신은 거기서 애들 건강할 수 있게 이리저리 지켜봐 줘요.


 당신이 졌던 짐을 내가 져보니, 여태 참 무겁게 사셨구나 싶어요. 가벼워질 순간을 위해 새집을 짓고, 내가 세간들을 유지할 수 있도록 쥐여주고서 당신은 가벼운 손으로 떠났지요. 나는 당신이 넘겨준 짐을 조금 더 달고 있다가 만나러 갈게요. 그러니 가벼운 이웃동네에서 찬찬히 지켜봐 줘요.


 이제 다시 내려갈게요. 당신이 넘겨준, 내가 이뤄온 세간을 지키고자. 세간에 당신의 흔적이 가득 묻었기에, 나는 쉬이 내려놓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벼운 몸으로 우리를 쉬엄쉬엄 지켜보듯이...


 그럼 우리, 바람소리도 다 들리고, 새들이 대신 지저귀고, 햇살이 깊은 잠을 더 재우는 이곳에서 다시 만나요.




 할머니는 다시 일어나 조심조심 언덕을 내려갔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유모차 소리인지 발목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땅거미가 지는 바람에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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