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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Oct 31. 2024

잊혀진 계절



 자연히 얻어진 삶은, 자연스레 생기를 잃어갑니다. 돌려주는 것일 뿐인데, 잃어버린 것이라 생각하는 약한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오늘 나는 여행을 나섰습니다.

 노트북과 도서관에서 빌린 낡은 책 한 권 뒷좌석에 채워두고, 가벼운 짐과 달리 여유 있는 손길로 커피를 내립니다. 행선지도 모르고 내려지는 액체만이 부엌에서 소담스러운 소리를 내며 텀블러 한 컵을 채웁니다. 위장에 한 방울이 들어가자, 승용차의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나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요.

 익숙한 동네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아 바퀴는 도시 밖으로 깜빡이를 켭니다. 침묵으로 찾아온 가을에 가로수 이파리들은 햇살에 나처럼 서걱서걱 말라가는 중입니다. 마른하늘에 손바닥의 수분은 점점 사라져 가는 정오. 편도 5차선의 도로가 어느덧 2차선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제법 한적해진 길. 가로수에는 먼지가 묻어 햇빛을 뿌옇게 반사합니다. 차창 밖에서 나의 여행을 지켜보던 꼬마 구름의 움직임에 맞춰, 나는 차에서 잠시 내려 들판을 걷습니다.


 꼬마 구름은 엄마 대신 내 손을 잡고 작은 유원지로 들어갑니다. 구름 따라 바람을 타는 코스모스 군락지와, 수많은 사연 위에 고요히 쌓인 돌탑들, 어린이의 손을 잡고 호수를 걷는 오후의 젊은 가족들... 십여 년 전 나는 저 구름을 닮은 하늘색 솜사탕을 딸아이에게 사주었을까요. 지나온 것은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평한 빛이 흐르는 들판을 떠나 숙연히 먼지가 가득한 숲으로 돌아갑니다.


 어느새 사람 대신 새들이 창공의 소리를 메우고, 발자국 대신 들꽃이 대지를 뒤덮은 숲 속의 정원. 정원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원두 향기에 자연스레 자동차의 속력은 줄어들었습니다. 따스한 차를 주문한 후, 사면이 통유리로 되어있는 2층으로 올라와 하늘 아래 앉았지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득한 저 능선 끝자락이 잡힐 듯 아련합니다. 능선 사이에 불이 꺼진 우리 집을 정확히 짚어내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김이 서리는 찻잔 위로 창으로 얼룩져 비치는 가을풍경이 내 모습으로 반사됩니다. 익숙함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순간, 유리와 거울이 반사된 시간과 계절 앞에 선 내게 낯익은 가사가 흘러내립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시월만 되면 영혼이 시려져 찾아 듣는 노래. 어김없이 잊혀진 계절이 생각나 찾아듭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잘 모르면서도 모호하게 스며드는 상실감. 잃어버린 시간과 잊혀진 계절 사이 가을처럼 바스락거리는 공허해진 마음은 뜨겁게 피어나는 유리 주전자 속 꽃을 바라봅니다. 매년 나는 무얼 그렇게 잃어버려온 걸까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뿌예진 창문에 집을 찾을 수 없게 된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켭니다. 노트북에서 문방사우의 묵은 향이 나기를...

 자판으로 꼬마 구름을 먹던 딸아이에 대한 문장을 쓰자, 나보다 더 커진 키로 나를 끌어안는 자식의 형상이 드러납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바뀌어 가는 것. 잊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기억을 넘겨주는 것.


 딸에게 엮어준 토끼풀 팔찌가 시들었다고 모녀의 팔찌를 잃은 것은 아닙니다. 토끼풀을 손목에 이어주었을 때부터 딸아이는 풀의 감촉을 배운 것일 뿐.  그리고 풀의 감촉을 기억해 겨울을 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대신하여 싱그러워가는 아이에게, 나를 조금씩 건조시켜 향을 가르칩니다. 나보다 더 볶여 갈색이 도는 커피 향을 전해주기 위해 나는 다시 집으로 시동을 겁니다.








https://youtu.be/fMmgz5RS0RE?si=J5XnDDCMRRZjg6F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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